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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영혼과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영혼 이해
주일뉴스 | 승인 2017.05.18 14:52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는 순간에도 의연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육체를 버리는 것을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보다 고결한 영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뇌에 대한 고찰을 잠시 멈추고 이쯤해서 영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스스로를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여긴다. 그런데 우리는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영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바람을 보며 영(靈)을 연상한 고대인들

모든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구약성경에서 ‘영혼’으로 번역이 가능한 단어는 3가지 정도다. 우선 우리가 흔히 ‘영’이라고 번역하는 ‘루아흐’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람’에 가깝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바람이 불면 풍랑이 치고, 나무가 흔들린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바람의 존재에 대해서 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실 세계에 구체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 고대인들이 바람을 보면서 영을 연상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바람은 자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우리 몸 아주 가까운 곳에도 있다.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그것이다. 그래서 루아흐의 두 번째 의미는 ‘숨’이다. 숨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루아흐라는 단어의 의미는 ‘생명’에까지 확장된다. 마침내 루아흐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데에 이른다. 더 나아가 루아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일컫는 데에도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영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두 번째 단어는 ‘네페쉬’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기록된 말씀에서 ‘생령’에 해당하는 말이 바로 ‘네페쉬 하야’이다. 한글 성경은 생령으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는 ‘살아서 약동하는 존재’라는 의미에 가깝다. ‘하야’는 존재(being)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네페쉬’는 ‘살아있는’ 정도에 해당하는 단어인 셈이다. 이 단어는 ‘욕구’, ‘감정’ 등을 포함하며 살아있는 인간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혹은 인간의 내면을 일컫는 데에도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단어로 ‘레브’가 있다. 앞선 두 단어는 인간의 내면을 일컫는 데에 사용되는 한편으로 살아있는 사람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레브’는 비교적 인간의 내면세계를 지칭하는 데에 그 의미가 한정된다. 이 단어는 마음, 이성, 감정, 판단, 의지 등을 표현할 때에 사용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 단어에 속한 행위로 묘사되기도 한다. 

생명이란 관점에서 한 덩어리인 ‘영혼’의 개념 

이러한 단어들의 뜻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영혼’이란 한편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지칭하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존재를 지칭하기도 한다. 현대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전형적인 영혼의 특성으로 분류되는 ‘영원한 생명’ 혹은 ‘신적인 생명’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육체의 생명 또한 영혼의 특성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구약성경에서 육체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은 구분할 수는 있으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한 덩어리의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단어들은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생명이라는 하나의 의미로 묶어나간다. 그래서 영혼은 한편으로는 몸(‘바사르’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함)과 구분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통전적인 특성이 된다.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영혼이라는 단어

그렇다면 신약성경의 경우는 어떨까? 신약성경에서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도 세 가지 정도가 있다. 프시케와 프뉴마 그리고 카르디아가 그것이다. 이 중 프시케는 지상에서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삶의 내면적 원리들을 가리킨다. 
신약성경에 프뉴마는 가장 직접적으로 ‘영’을 의미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주로 성령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되는 그 밖의 예들을 보면 인간의 자아 혹은 마음 등을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카르디아는 주로 인간의 내면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생각, 마음, 이성, 판단 등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카르디아는 ‘하나님의 처소’로 불린다. 신약성경에서 영혼을 번역할 수 있는 단어들은 대체로 인간의 내면 즉 마음이나 생각, 이성 등을 의미한다.1)
따라서 성경에서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들은 대체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영혼은 생명이다. 영혼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과 동의어로 생각할 수 있다. 영혼과 생명을 연관 짓는 사고는 결국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해로 확대된다. 이는 구원과 영생의 소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생명으로서의 영혼은 일차적으로 지상에서의 생명도 포함한다. 
둘째, 영혼은 인간의 내면을 가리킨다. 우리가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고, 의지를 갖고 자신의 중심을 지켜나가는 모든 것은 영혼의 작용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내면에만 한정 지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한편으로 영혼은 통전적인 인간 전체 혹은 그런 인간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기독교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곧 유럽 전역으로 전파된다. 그 후 유럽은 주류 기독교회가 자라나는 토양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이전의 헬레니즘 문명에서는 영혼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까?

기독교 이전의 헬레니즘 문명에서의 이해

고대 그리스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알려진 일리아드에서는 영혼이 인간의 내부에 있고 인간이 살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웅장한 노래에서 영혼은 종종 인간의 내장과 동일시된다. 전쟁터에서 창을 맞아 내장을 쏟고 죽은 시체는 영혼이 빠져나온 것으로 그려진다. 여기에서 물질적 존재와 형이상학적 존재를 구별하지 않는 고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리스의 최초의 철학으로 알려진 이오니아 자연철학에서도 발견된다. 이 사고체계에서 물질은 고결한 것과 저급한 것으로 구별되며, 고결한 것일수록 가볍고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지닌다고 보았다. 따라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고결한 것이고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의 것은 저급한 것이 된다. 불이나 공기는 고결한 것이고 물과 흙은 상대적으로 저급한 것이다. 영혼은 가장 고결한 것으로 공기와 비슷하다고 여겼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육체와 고결한 영혼을
엄격하게 구분한 소크라테스의 이원론

그리스 철학에서 물질적 존재와 형이상학적 존재를 구별한 최초의 철학자라는 영예는 소크라테스에게 돌리는 것이 적합하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남긴 어떤 저술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그의 제자 플라톤이 전한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플라톤의 주장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견해가 모두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소크라테스는 욕망에 좌우되는 물질로써의 육체와 고결하며 궁극적 존재인 영혼을 구별한 이원론자였다. 플라톤의 증언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는 순간에도 의연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육체를 버리는 것을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보다 고결한 영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의 이원론적인 사고는 플라톤을 통해 더욱 심화된다. 그는 영원히 참된 실체들의 세계인 이데아와 거짓되고 곧 사라질 헛된 세계인 물리 세계를 구별했다. 영혼은 물질로 구성된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있지만, 본질적으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 것이었다. 그는 영혼이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의 내면의 작용에 상응하는 것이었는데, 각각 이성적 영혼, 감정적 영혼, 욕망의 영혼이 그것이다. 이 중 욕망은 가장 저급한 것이며 영혼에 묻은 얼룩과 같은 것이었다. 감정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전통적인 덕목이었던 용기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영원할 수 없다고 보았다. 플라톤이 보기에 감정과 욕망은 사후에 모두 사라질 것이었다. 반면에 이성적 영혼은 영원하며 사후에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었다. 영혼의 궁극적 자리는 이성이었던 것이다. 

욕망을 영혼에 묻은 얼룩으로 본 플라톤

플라톤의 사상은 고대 헬레니즘 세계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독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플라톤의 견해는 헬레니즘 문명에 뿌리를 내린 고대 기독교의 영혼 개념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결국 그의 영혼 이해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영혼은 본질상 인간의 내면 작용이다. 이는 이성과 감정 욕망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영혼의 자리는 이성에 가깝다. 감정은 불완전하며 욕망은 제거되어야 할 악이다.
둘째, 영혼은 인간의 사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이나 욕망 같은 부분이 제거되어 오히려 완전해진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참된 실체로서의 영혼이라는 개념과 인간의 내면 혹은 복합적인 정신작용이라는 영혼 개념은 기독교의 영혼 이해로 이어지게 된다. 다음 글에서 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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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나타난 영혼을 의미하는 단어들의 뜻과 용례에 대해서는 앤서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을 참고함.

 

문상호 목사 / 기쁨가득한 교회 

주일뉴스  isaac1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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