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지파’ 그리고 사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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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지파’ 그리고 사마리아
  • 주일뉴스
  • 승인 2017.05.1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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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북방 이스라엘 왕국과 남방 유대 왕국은 싸움을 거듭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아합 왕과 유대 요샤파테 왕은 동족 간 분쟁이 무익함을 깨닫고 동맹을 맺는다. 그 후부터 두 나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또한 주위 강대국들도 서로 간 세력의 균형을 유지함에 따라 얼마간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지역에는 평화가 유지된다. 그러나 새로운 패권자 아시리아의 등장으로 이 지역에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시리아 제국은 메소파티미아 지역에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온다. 그러다 필레세스 3세 때 시리아를 탈환함으로써 종교적으로는 아슈르 신과 바벨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대리자로서의 신적 위엄을 떨치기에 이른다.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공격한 것은 살만에셀 5세(BC 727-722) 통치 시기였다. 그리고 북방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왕은 호세아(BC 732-722)였다. 아시리아는 이전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각 지파를 여러 곳에 흩어져 살게 만들었다. 심지어 호세아 재임 때는 이스라엘 왕국이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의 영유지 정도만 남아있을 정도로 세력이 축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감행한다. 아시리아에 살만에셀이 후임 왕으로 즉위하자 이집트 소(So) 왕과 연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바치던 공물을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소 왕은 역사적으로는 불확실한 인물이다. 실제로는 22대 왕조 오소르콘 4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세아는 당시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이집트와의 관계를 확대해석하게 된다.    
화가 난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에 군사를 이끌어 오고, 결국 호세아는 감금당하는 처지가 된다. 한편 왕이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사마리아 성은 아사리아의 공격을 나름 훌륭히 방어하며 잘 버틴다. 그러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보이던 사마리아도 3년간의 끈질긴 항전에 마침표를 찍는다. 식량 부족으로 결국 아시리아에게 함락되고 만 것이다. 이후로 북 이스라엘은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같은 해 아시리아의 살만에셀이 죽고 사르곤 2세가 즉위한다. 그는 북방에 거하던 10지파를 흩트리는 정책을 시행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 영토로 끌어와 살게 하는 한편, 시리아와 바빌론 지역의 주민들을 보내 사마리아 지역 여러 성읍에 정착하도록 한 것이다(왕하 17). 이 때문에 유대 민족은 이후로 사마리아인들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쿳팀(쿳타에서 온 사람들)’이라 부르며 경멸하기까지 했다. 후대에 회자(膾炙)되는 ‘잃어버린 10지파’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앞서 언급한 아시리아의 필리세스 3세, 살만에셀 5세, 사르곤 2세까지 3대에 걸친 합작품인 것이다.  
한편 북왕국 10지파의 향후 거취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신약시대로 넘어와도 이에 대한 언급은 누가복음에서 ‘선지자 안나는 아셀 지파 사람’이라는 단 한 번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수세기 후 ‘잃어버린 10지파’에 관한 이야기는 메시아의 재림사상과 연결되는 문학의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일부에서는 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일부 그룹(브리튼 원주민, 아메리카 원주민, 일본인 등)이 10지파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설(說)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흥미는 현재에도 유효하기에 역사적 판타지 소설의 주제로도 자주 쓰이고 있다.     
북왕국의 중심지였던 사마리아는 왕국의 멸망 후 헬레니즘 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 문명이 들어오게 된다. 로마시대에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헤롯을 유대 분봉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한다(이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에 다시 나눠보자). 헤롯 왕은 사마리아를 세바스테(Sebase; 왕의 이름을 뜻함)로 명명하고 로마황제를 기린다. 그는 추진하던 건축사업을 사마리아에도 적용하여 이방 신전을 수없이 세운다. 이런 까닭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치기도 싫은 천박한 도시로 여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과는 절대 상종하지 않는다. 하지만 AD 30년경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됨으로써 사마리아의 지위는 새삼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당시 유대인도 대부분 의심하였던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그 천한 사마리아 여인이 알아본 것이다. 또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행인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모른 체 지나갔으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도왔다는 예화를 예수가 선포함으로써 복음 속에 사마리아가 진출하게 된다.

이병선 교수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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