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잃어버린 시대, 로봇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상태바
‘우리’를 잃어버린 시대, 로봇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 주일뉴스
  • 승인 2017.03.31 11: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처럼 더 이상 로봇은 인간이 일할 수 없는 환경에서,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인간을 위로하는 로봇들이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다. 

당신은 ‘로봇’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을 떠올리는가? 나는 어렸을 적 즐겨 보았던 로봇만화들이 떠오른다. 외계인들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소년 주인공이 탑승해서 싸우는 거대한 인간형 군사무기 말이다. 확실히 로봇은 소년의 가슴을 뛰게 하는 어떤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보다는 좀 심심하고 현실적이다. 대개의 경우 로봇은 인간 노동자가 투입되어 일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거나 혹은 인간이 일하기에는 지나친 단순 반복 업무에 사용된다.
한편 좀 더 감성적인 역할을 하는 로봇들도 있다. 그것들은 이메일을 대신 읽어주거나 음악을 찾아서 틀어주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서 친구에게 전송해 준다. 사실 이런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에 이미 탑재되어 있는 기능들이다. 다시 말해 반드시 필요한 로봇은 아니란 뜻이다. 
어떤 로봇은 가정의 전자기기들을 제어한다. 집안의 조명을 켜고 끌 수 있으며 온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텔레비전을 켜서 원하는 채널을 찾아주기도 한다. 심지어 당신이 집을 나선 이후에 가스레인지를 끄고 나왔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휴대폰 등으로 로봇에게 명령해서 확인 할 수 있다. 하지만 혹시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 로봇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스위치를 켜거나 끄는 모습을 상상했다면 오해에 불과하다.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거주하는 집, 그리고 그의 집무실이라 할 수 있는 스타크 타워는 ‘자비스’라는 인공지능이 통제한다. 자비스는 본체가 없는 인공지능이지만 토니가 어디서든 명령만 하면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다. 토니가 전화를 받으면서 불을 켜라고 하면 불이 켜지고 음악을 요구하면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한다. 로봇 집사가 허둥지둥 뛰어다니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비스는 목소리만 들릴 뿐 겉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본체가 없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토니의 집 어디에나 거주한다. 물론 이 영화 속의 자비스처럼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시스템은 이미 존재한다.

실체적 로봇이 불필요해진 인공지능시대 
그럼에도 꾸준히 제작되는 소형로봇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정말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위해서 굳이 로봇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것은 가정이나 사무실의 각종 전기기기들을 통제하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조정하는 인공지능만 있으면 된다. 눈에 보이는 본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굳이 소비자가 눈을 맞추고 명령할 귀엽게 생긴 조그마한 로봇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좀 더 직관적으로 사람과 대화하는 로봇도 있다. 일본 기업 혼다에서 만든 ‘아시모’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로봇이다. 아시모는 사람의 동작을 알아보고 적절히 응대할 수 있고, 음료수를 서빙할 수도 있다. 소프트뱅크에서 만든 로봇 ‘페퍼’는 실제로 2014년에 일본의 네스카페 매장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직원으로 투입되었다. 
물론 카페에서 진상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아르바이트생의 감정 노동은 고되다. 하지만 그것이 극한의 환경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아직 고객을 응대하는 일은 비싼 로봇보다는 사람이 훨씬 더 잘하는 영역이다. 로봇 직원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여전히 로봇전시장이다. 이것은 자사의 기술력을 과시하려는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활발히 제작되는 정서적 교감로봇
실용적 로봇에게도 쉽게 감정 투영

이처럼 더 이상 로봇은 인간이 일할 수 없는 환경에서,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인간을 위로하는 로봇들이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현재 존재하는 로봇에 탑재되는 인공지능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감정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다.1)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의 말과 행동에 반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된다. 또한 학습을 통해 좀 더 세밀한 반응이 가능하다. 실제로 페퍼는 거짓 웃음을 구분하여 “당신의 눈은 웃고 있지 않네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 어느새 우리는 로봇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 우리는 그것과 교류하고 정서적인 감정을 투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친구’처럼 대한다.
사실 로봇에게 감정을 투사하기 위해서 로봇이 꼭 인간에게 적절히 반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투박하고 훨씬 더 실용적인 목적에서 개발된 로봇에게도 우리는 쉽게 감정을 투여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첨단 전쟁무기의 전시장 같았다. 그리고 이 무기 중에는 군사로봇도 있었다. 미군은 팩봇(PackBot)과 탈론(Talon) 등 각종 군사로봇을 정찰과 폭탄 해체 등의 임무에 투입했다. 전장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각종 장비 등도 고장 나거나 파괴되는 일이 빈번이 일어난다. 물론 로봇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로봇이 파괴되었을 때 보이는 군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어떤 부대는 자신이 운용하는 팩봇에 ‘스쿠비 두’(Scooby Doo)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로봇은 35회에 걸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결국 망가져 버렸다. 그런데 이 로봇이 투입되었던 부대의 어떤 병사가 로봇의 제작사인 아이로봇에 이렇게 요청했다고 한다. “제 생명의 은인인 스쿠비 두를 제발 고쳐주십시오.” 적어도 그 병사에게 그 로봇은 장비나 무기가 아니라 ‘전우’였던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전장을 함께 거쳐 온 사이였기에 진한 ‘전우애(?)’가 싹튼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의 사례를 보면 로봇에게 감정을 투영하기 위해서 꼭 극한의 경험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로봇과 전우애(戰友愛)를 나눌 수 있을까? 
로봇에게 불쌍함을 느낄 수 있을까?

미국의 보스턴 다이내믹스(Boston Dynamics)는 2005년에 ‘빅독(BigDog)’이라는 군사용 로봇의 영상을 공개했다. 그것은 4개의 다리로 움직이는 로봇이다. 어느 정도의 경사도가 있는 산지를 오르내릴 수 있고, 울퉁불퉁한 야외의 환경에서도 짐을 싣고 다닐 수 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이 로봇이 야전(野戰)의 어떤 환경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홍보 영상에 어떤 사람이 빅독을 발로 힘껏 걷어차는 장면을 실었다. 빅독은 발길질에 밀려나지만 잠시 비틀거릴 뿐 넘어지지 않는다.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폭발이나 충돌 등의 경우에도 빅독이 넘어지지 않고 기능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빅독을 발로 찬 행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제대로 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기 자동차를 발로 걷어차는 장면을 목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나 혹은 반려동물을 걷어찬다면 비난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빅독을 걷어찬 사람을 비난했고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비난했다. 사람들은 충격에 잠시 비틀거리는 빅독을 보고 ‘불쌍하다’고 느꼈다. 빅독을 걷어차는 행위를 ‘잔인하다’고도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 영상을 통해서 생전 처음 본 로봇인 빅독을 사람이나 적어도 살아있는 생물처럼 대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로 대우받는 로봇
로봇에게 비춰보는 현대인의 외로움

앞서 언급한 팩봇과 빅독은 군사용 로봇이다. 그것은 인간과 교감하기 위한 어떤 기능도 염두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인간 혹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대우했다. 그렇다면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형으로 제작된 로봇의 경우는 어떨까?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페퍼를 걷어차서 손상시킨 취객은 페퍼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페퍼를 걷어찬 행위를 기물파손이 아닌 폭행이라고 인식했다.
1990년대에 이탈리아의 과학자들은 원숭이의 뇌에서 ‘거울 신경세포’(Mirror Neuron)라고 불리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의 뇌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는 어렵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이와 동일한 세포가 있는지는 아직 분명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이에 공감하면서 점차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결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는지도 모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지금 우리는 ‘우리’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언제나 외롭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외로움을 위로해 줄 로봇친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를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기계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상호 목사 /기쁨가득한 교회 

 

지금 우리는 ‘우리’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언제나 외롭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외로움을 위로해 줄 로봇친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를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기계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