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상처가 아닌 추억으로 만들어준, 행복한 삶의 그루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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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상처가 아닌 추억으로 만들어준, 행복한 삶의 그루터기
  • 주일뉴스
  • 승인 2017.03.10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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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행복

어제는 역삼동 뒷골목 허름한 삼겹살 구이 집에서 역사학과 교수님과 그 지인 몇 분을 만났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니 동시대를 살며 공감했던 이야기들에 정겨웠다. 
굳이 내 부모 세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빈곤과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주던 밀가루 배급을 기억하고 있다.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 총생산이 67달러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아이들까지 집안에 있는 물건 중 밀가루를 담을 수 있는 바가지나 통(그때는 플라스틱 통도 아주 귀했다)을 총동원해서 손에 들고 배급 차량 앞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커다란 밀가루 자루의 실밥을 뜯을 때마다 하늘로 피어오르는 뽀얀 밀가루를 온통 뒤집어 쓰고도 마냥 좋아 했다. 간혹 운이 좋아 한동네 사는 공무원 눈에라도 뜨이면 “어이구, 누구야 이리 오너라”하면서 남들보다 한 바가지 덤을 얻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누구도 도시락을 가져 올 수 없으니 기아대책으로 거칠고 누런 옥수수 빵을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다. 한 반에 80~90명하는 학생 수에 비해 많은 양이 들어오는 날이면 남는 빵은 하교 후 청소당번을 자청하는 학생들에게 돌아갔다. 그 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손을 높이 들고 청소를 자청 했다. 
그렇다고 그 빵을 자기 입에 넣는 아이는 없었다. 집에 있는 형, 누나와 동생들이 눈에 밟혀 빵 하나라도 가져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만 들어도 우리 민족이 얼마나 극심한 기아 속에서 살아왔는지 가슴이 저려온다.
나의 어린 시절도 별반 다르지 않아 먹을 것이 늘 넉넉지 않았다. 군것질 할 것도, 할 능력도 없었다. 내가 자라던 신길동 동사무소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밀가루 한 포대씩 무상으로 지급을 해줘서 언제나 집엔 밀가루가 있었다. 엄마 아빠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비우시면 우리는 연탄불에 양은 냄비를 올려놓고 하얀 밀가루가 노릇해질 때 까지 볶은 후 하얀 설탕을 섞어 먹었다. 당시 어린 우리의 입에는 비할 데 없이 황홀한 맛이었다. 별 것 아니지만 얼마나 그 맛이 얼마나 고소하고 달콤했는지 모른다. 오빠와 동생과 함께 코와 볼에 밀가루를 묻혀가며 먹었던 볶은 밀가루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정겨운 추억이다. 
가난했던 기억이야 셀 수 없지만 불행했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가난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힘들게 일하시던 부모님과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던 형제들의 우애가 행복한 삶의 그루터기로 남아서일까…. 
요즘은 굶주리며 사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영양 과잉시대라고도 한다. 집집마다 상당한 양의 음식 쓰레기가 나오고 있다. 저마다 다이어트를 하느라 또 다른 소비를 한다. 
허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먹을 게 없던 가난한 시절보다 더 많은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낸다. 그 시절보다 백 배 많은 소득을 가지고 더 많은 풍요를 누리면서도 만족을 모른다. 20평짜리 집에 살면서도 더없이 행복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30평짜리에 살지 못하는 것을 불행으로 여긴다. 
일반적으로 20대에 부자가 되기를 꿈 꿀 수는 있어도 대부분 그 나이에는 아직 부자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간의 사람들은 부자 부모를 둔 금수저 이야기를 꺼낸다. 금수저란 꼭 돈이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는 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건강한 신체, 냉철한 판단력, 근면함과 인내력과 불굴의 도전의식, 이들 중에 단 하나라도 가졌다면 그는 이미 금수저가 아닐까.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돈을 물려주지는 않았지만, 성실함과 튼튼한 체력을 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기어이 일어섰다. 우리 세대에 금수저로써돈을 물려받은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저마다 이를 악물고 배우고 익혀서 가난의 질곡을 벗어났다. 
세상이 풍족하게 된 것은 값없이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애초부터 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탓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보기도 전에 남들 손에 가진 것만 부러워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김의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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