윷가락 속에 아버지의 온기가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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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가락 속에 아버지의 온기가 서려 있었다
  • 임하초
  • 승인 2017.01.1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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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계실 때 이런 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네 개의 윷가락을 던지니 그 옛날 아버지의 모습과 웃음소리, 동네사람들까지 훤히 생각났다. 고향의 겨울 햇살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겨울 햇살이 잘 드는 농한기에는 시골 마당에서 둥근 멍석을 깔고 윷놀이를 했다. 오늘 같이 햇살이 좋은 날은 옛날 우리 집 마당에서도 윷놀이가 펼쳐졌고 아버지는 항아리에 막걸리를 한 말 부어 놓고 윷판에 말을 놓는 아저씨께 술을 권하셨다. 윷, 모가 나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랫가락이 더 높아지고 막걸리도 연신 퍼내셨다. 
기합 소리를 내며 윷가락 높이를 다르게 던지니 윷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윷판의 말을 위해 걸어가자 걸을 원했고, 도야지 잡자고 도를 내라며 윷가락을 힘껏 멍석에 패대기치기도 했다. 그러다 던져진 윷가락이 말판 밖으로 나가 낙이 선언되면 탄식 소리가 터져 나오지만 이내 윗마을까지 울려 퍼지는 상대편의 환호성에 덮이고 말았다. 쌍말이 잡히면 던지기를 잘못해서 그런 거라며 생떼를 쓰는 아저씨는 사생결단의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해 둘러선 아이들까지 결론이 어떻게 날지 궁금해서 조용해졌다. 상대편도 만만치 않게 헛소리라고 강하게 손을 흔들며 다시 윷을 던지면 생떼를 쓰던 아저씨의 얼굴은 멀쑥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에 큰 소리로 웃는 사람들의 소리가 장남평야 들판까지 가득했다.
겨울 햇살 아래서 펼쳐지는 윷놀이는 모든 사람이 함께 겨울나기에 좋은 놀이였다. 손안에 잡힐 만큼의 굵기인 참 나무를 한 뼘 반 정도의 길이로 자른 후, 반으로 쪼개 곱게 다듬었다. 그런 후 나무토막의 껍질 부분이 선명하도록 검은 표시를 했다. 이렇게 네 개의 윷가락과 윷판에 말로 쓸 네 개의 공깃돌이 있으면 됐다. 윷판은 직사각형의 각 모서리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직사각형 안에 그린 두 개의 대각선을 따라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윷가락의 껍질 쪽이 모두 하늘을 향해 있으면 모고, 바닥을 향해 있으면 윷인데 말판에 말을 놓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이 잡히지 않고 달릴 수 있어 말의 방향이 중요했다. 윷을 던지는 본새는 야구공을 던지는 사람만큼이나 진지하니 나른한 겨울에 긴장감을 갖고 크게 웃으며 흥겹게 지낼 수 있었다.
윗마을 아랫마을 내기가 있을 때는 동네의 큰 명예가 걸린 듯 모두 놀이에 집중했다. 패한 마을 사람들은 다음날 다시 도전장을 내니 봄 농번기가 될 때까지 윷놀이는 계속되었다. 저녁에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돗자리 위에다 윷가락을 던지며 모가 났다고 한참씩 춤을 추시곤 했다. 뜨거운 고구마를 동치미랑 먹으며 밤이 늦도록 윷을 노는 소리가 이맘때에는 동네 가득했다. 아버지는 윷가락을 내 손에 맞게 가늘게 만들어 주셔서 남동생과 토닥토닥 밤낮으로 놀곤 했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를 작년 말 집으로 모셨다. 설날에 오빠들과 떡국을 먹고 윷놀이를 하자고 했다. 고향마당에서 하던 윷가락을 꺼내자 오빠들은 무척 반가워했다. 
양화리 동네 자체를 다 헐어내고 세종 도시가 되면서 우리 집도 헐게 되었을 때였다. 집 안팎을 정리하던 중 오래된 전축 받침대 서랍에 있던 윷가락을 발견했고 얼른 가방에 담아왔었다. 작은 윷가락과 어른들이 하던 윷가락 등 3벌을 꺼내 놓자 오빠들은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윷가락을 비벼보며 좋아했다. 
고향 마당에서처럼 고함을 치며 윷가락을 높이 던지지는 못하지만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모여 상대방의 말을 잡았다고 웃는 소리가 집 안에 가득 찼다. 윷가락을 집어 든 사람은 자연스레 아버지와 고향에 대한 추억을 말하고 그때처럼 윷가락을 던지며 서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져갔다.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더 크게 웃었다.
어머니가 계실 때 이런 날이 오기를 고대했었다. 네 개의 윷가락을 던지니 그 옛날 아버지의 모습과 웃음소리, 동네사람들까지 훤히 생각났다. 고향의 겨울 햇살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윷가락으로 한 해를 시작하니 기분이 좋다며 오빠들은 고향의 윷가락을 간직해 온 것에 대해 고마워했다. 모두가 돌아 간 후 윷가락을 잡아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고 또 다른 추억이 스며져 있었다.

임하초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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