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고통은 끝을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를 돌아보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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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고통은 끝을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를 돌아보시옵소서!
  • 문상호
  • 승인 2016.11.2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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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땅은 적들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 분명하건만 더 이상 그 땅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땅에서 난 것을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몸은 여전히 바로 그 땅에 살고 있지만 땅으로부터 소외된 존재가 되었다.

애가는 총 5편의 시로 이루어진 일종의 연작시 모음집이다. 이 다섯 편의 시들은 약간씩의 시차를 두고 기록된 것 같다. 1장과 2장은 멸망당한 도성 예루살렘을 의인화하여 화자로 내세운다. 여성 화자로 등장하는 예루살렘은 본래 하나님 곁에 있던 천상적 존재로 나타난다. 천상의 시온이 하나님 곁에서 내쫓겼을 때에 지상의 도성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는 예루살렘의 파괴가 단지 세속적인 전쟁의 결과가 아님을 보여준다.
3장의 화자는 남성이다. 그는 백성에게 버림을 받은 왕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받은 자다. 그는 몸이 찢겨 죽었으나 살아있다. 그는 고난의 극한에서 마침내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본다. 
4장의 화자는 ‘우리’이다. 1장부터 3장까지의 화자가 다분히 신비로운 존재였던 것에 비해 4장에 이르러 비로소 직접적인 ‘우리’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4장의 우리는 예언서의 공식에 충실하다. 4장의 우리가 이해하기에 이 극심한 고난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가장 거룩해야 할 도성 예루살렘의 가장 거룩한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오히려 가장 타락한 사람들로 지목된다. 우리는 범죄했고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셨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오랜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죄가 극심했다 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형벌의 나날을 맛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속히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소망한다. “하나님, 우리가 형벌을 받은 기간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제 5장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화자는 역시 ‘우리’다. 4장의 소망으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4장의 예언서의 공식대로라면 5장에는 회복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만 한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주님, 우리가 겪은 일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 주십시오. 유산으로 받은 우리 땅이 남에게 넘어가고, 우리 집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가 되고, 어머니는 홀어미가 되었습니다. 우리 물인데도 돈을 내야 마시고, 우리 나무인데도 값을 치러야 가져 옵니다. 우리의 목에 멍에가 메여 있어서, 지쳤으나 쉬지도 못합니다.』 
(애 5:1-5, 새번역)

5장은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탄원이며 기도이다. 유다 왕국의 패망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적들이 유다와 이스라엘 전역을 지배하고 있다. 전쟁은 아마도 한 세대 이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세대는 유다와 바빌로니아가 전쟁하던 때에 싸웠던 전사들이었을 것이다. 유다가 패망할 때에 그들 대부분은 전사했다. 지금 세대들은 일찍 아버지를 잃은 고아들이다. 어머니들은 남편을 잃은 과부가 되었다. 적들이 우리의 땅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물도 마음껏 마실 수 없고 땔감도 마음껏 모을 수 없다. 물이든 나무이든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적들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려면 값 주고 사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목에 멍에가 메여 강제 노동에 동원되는 노예가 되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숫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아브라함이 거니는 바로 그 땅, 팔레스타인에 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실현하신 것은 모세가 살던 시절이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멀리 이집트에서 목에 멍에를 멘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다. 이집트가 아무리 강대한 국가일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이집트가 아무리 멀리 있는 나라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곳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이끌어 내어 팔레스타인까지 인도해 들이셨다. 그러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조상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바로 그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땅을 점령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열두 지파가 각각 그들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그 땅은 지상에서 그들이 실제로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 땅은 하늘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진실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 따라, 그들은 지상에서도 먹고 살 수 있는 땅을 부여받았다.
그들이 과거 이집트에 있을 때에는 멍에를 멘 노예였다. 그들이 비록 이집트에서 400여 년을 살았을 지라도 그들은 이집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향을 찾아 떠도는 나그네일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수많은 신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은 남편이 없는 과부였으며, 아비가 없는 고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셨고 남편이 되어주셨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 거할 때에, 그들은 더 이상 고아도 과부도 아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인이었고 그들은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없었던 일처럼 되어버렸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땅은 적들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 분명하건만 더 이상 그 땅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땅에서 난 것을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몸은 여전히 바로 그 땅에 살고 있지만 땅으로부터 소외된 존재가 되었다. 비유컨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땅으로부터 거절당한 카인의 삶이 이와 같았으리라. 카인이 저지른 범죄, 그 살인죄가 그를 땅에서 소외된 자로 만들었던 것처럼, 그들도 조상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땅에서 소외된 자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땅에서 소외되었을 때에, ‘우리’는 다시 고아와 과부가 되었다. ‘우리’는 영적으로만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의 아버지를 잃은 고아가 되었고, 지상의 남편을 잃은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 이집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도로 노예가 되어버렸다. 단지 영적으로만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적들의 소유물이 되어버렸다. ‘우리’에게 더 이상 자유는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자유민이 아니다.
적들이 이 땅을 정복하였으나, 이 땅의 치안을 확보하지는 않았다. 이 땅은 말 그대로 버림받았다. 이는 실제 바빌로니아 제국의 역사와도 일치하는 증언이다. 옛 유다 왕국이 있던 팔레스타인 일대는 오랜 기간 그저 버림받은 황무지였고 무법지대와 다를 바 없었다. 이제 팔레스타인에 살아남은 유대인의 무리는 겨우 생존에 필요한 최저한도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도 죽음을 무릅써야만 한다. 황무지가 된 이 땅에서 언제 어디에서 강도의 습격을 받을지 모른다. 이 땅을 지배한 제국의 군대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겨우 강도의 눈을 피해 식량을 구했다 할지라도 제국 군대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죽임을 당한다. 
5장의 ‘우리’는 굶기를 밥 먹듯이 한다. 우리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한다. 우리 젊은이들과 아이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된다. 나이든 이들이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나름의 공동체를 형성해 보지만, 그 작은 마을의 촌장들은 걸핏하면 적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어디에도 우리 조상들이 누렸다는 영광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탄원하고 기도한다. 4장에서 ‘우리’는 이미 그 고난의 날이 충분히 오래되었다고 여겼다. ‘우리’는 하나님이 곧 구원하실 날을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애 5:19-22, 개역한글)

문상호 목사 / 기쁨가득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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