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이여, 너의 죄악의 형벌의 날이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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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이여, 너의 죄악의 형벌의 날이 다하였다
  • 문상호
  • 승인 2016.11.0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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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에게 임한 고난의 날이 너무 오래되지 않았는가? 예루살렘의 죄로 인한 심판이라기에는 겪는 고난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극심한 고난이라는 부조리, 그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유대인의 인식은 곧장 소망으로 이어진다.

애가 4장은 애가 전체에서 가장 예언서의 공식에 충실하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유다 왕국은 멸망당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침탈당했다. 예루살렘의 청년들은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었다. 심지어 아기들이 친모의 손에 죽임을 당해 한 끼 식사로 전락하는 일이 일어났다. 유다 왕국의 귀족과 지도자들은 더 이상 존경을 받지 못한다. 평생 고생이라곤 모르던 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거리를 배회한다. 

죄악이 관영한 예루살렘에게 ‘하나님의 날’은 구원이 날의 아닌 심판과 멸망의 날 

이 모든 일은 왜 일어났는가? 이것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범죄 때문이다. 가장 거룩해야 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들은 의인을 죽였다. 
유다는 멸망의 위기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 구원의 길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그들은 외교를 통해 강대국의 힘을 등에 업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본 나라들은 정작 유다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구원이 될 수 없었다. 
유다에도 왕은 있었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세우신 왕이다. 당연히 그는 유다의 구원이어야 했다. 유다의 왕은 자신의 권력을 위하는 자가 아니라,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현존은 지상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왕은 유다를 구원하는 일에 실패했다. 예루살렘은 멸망당했고 환란과 고난은 끝이 없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는 가혹한 형벌로 돌아왔다. 예언자들이 경고했던 바로 그 심판이 임했다. 하나님의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었다. 그들은 고난을 당한다. 그들은 형벌을 받고 있다. 그들은 고통 중에 버려졌다.
그러나 예언서는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는 책이 아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분노와 형벌만을 선포하는 자가 아니다. 예언자는 모두가 괜찮다고 할 때에 멸망의 징조를 본다. 예언자는 태평성대에 불의와 죄악을 본다. 예언자는 권력자의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회개를 외친다. 그러나 예언자는 모두가 절망했을 때에 구원의 소망을 본다. 예언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환란의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예언자는 침략자의 강력한 군대 따위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하나님의 구원을 외친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서들은 구약의 복음서라 할 만한 책이다. 예언서는 심판과 멸망의 예언으로 시작하지만 구원과 회복의 예언으로 끝난다. 

멸망 속에서도 구원의 희망을 노래하는 애가의 시인

애가 4장도 마찬가지다. 4장에서 시인은 예언서의 공식에 가장 충실하다. 시인은 유다의 지도층의 죄악을 고발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한다. 적어도 4장에서 시인이 보기에는 유다의 멸망은 전적으로 그들의 죄악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그러하듯이, 시인도 멸망을 노래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4장에서 시인은 구원의 희망을 본다.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 잔이 네게도 이를찌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애 4:21-22, 개역한글). 

에돔은 유다 왕국의 바로 이웃한 나라이다. 대개의 국가가 그러하듯,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곧 역사적으로 잦은 충돌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에돔의 시작이 야곱의 형제인 에서에게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두 나라의 우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경우 유다와 에돔은 서로 적국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침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수처럼 여겼다.

그러므로 유다의 멸망은 에돔의 입장에서는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에돔은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였고 유다를 저주하였다. 적국 유다는 멸망당했으나 강대국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런 사실에 에돔은 크게 고무되었는지도 모른다. 에돔은 그들이 여전히 건재할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구원의 날이 이를 것이다. 유다를 저주하며 비웃던 에돔은 오히려 멸망을 당할 것이다. 유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인은 노래한다. 유다는 이미 충분히 오래 형벌을 받았다! 유다가 형벌을 받았던 날들이 이미 충분하다! 유다의 심판의 날은 이제 지나갔다!
이것은 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살아남은 유대인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팔레스타인에 여전히 살아남은 이들도 있었으리라. 어떤 공동체는 이집트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때로 용병 노릇을 하며 살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구약성경에는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공동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당대 최고의 문화와 무력을 가진 거대 제국이라는 장벽에 짓눌려 살았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미 멸망해 버린 조국과는 달리 너무나 부강한 이 거대한 제국 앞에서 과연 이스라엘의 회복을 언감생심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지나친 고난에 대한 호소 그리고 구원의 당위성 주장

도무지 그들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대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언제까지 우리를 버려두시렵니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언제쯤이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생각이십니까?”,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이러한 부르짖음의 끝에서 그들은 어떤 소망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들의 고난이 충분히 오래되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과거 그들의 조상, 혹은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고 형벌하시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고난의 날이 너무 오래되지 않았는가? 우리의 죄로 인한 심판이라기에는 우리가 겪는 고난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극심한 고난이라는 부조리, 그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은 곧장 소망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고난의 날은 이미 충분히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곧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애가 4장의 마지막은 이러한 공동체의 결론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노래한다. 
“유다여 비록 너의 겪는 고난이 심할지라도 너는 기뻐하라. 이미 너의 고난의 날이 충분히 오래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너에게서 고난을 거두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곧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애가 4장이 고난 그 자체에 집중하는 애가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예언서의 공식에 가장 충실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애가 4장 역시 결론은 ‘지나친 고난’이라는 부조리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애가의 다른 부분과 일치된 견해를 나타낸다. 애가 4장에서 시인은 노래한다. “우리의 고난은 분명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충분히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겪는 고난은 지나친 고난입니다.”
‘지나친 고난’이라는 부조리, 그 모순된 상황에 대한 인식은 곧장 하나님의 구원의 당위성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다. 이제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한다! 애가 4장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예언서의 공식에 충실하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애가 4장의 이후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이어야 할 것이다. 4장의 결론에서 독자들은 이제 드디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야기가 나올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5장의 내용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5장은 아마도 구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한 때, 애가 4장은 독립적인 시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형태로 애가가 편집되는 과정에서 4장이 애가의 마지막인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5장은 아마도 가장 나중에 애가에 편입되었으리라. 4장으로 끝나는 애가는 구원을 소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애가 전체가 제아무리 비참한 상황을 노래할 지라도 4장으로 완결된 애가는 결국 소망의 노래, 구원의 노래가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손에 전달되어진 애가는 모두 5장으로 구성된 이야기이다.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섣부른 소망은 너무 이르다. 그리고 5장은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뜻밖에도 다음과 같이 끝난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애 5:22, 개역한글).

문상호 목사 / 기쁨가득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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