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하고 더욱 고통당한 예루살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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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하고 더욱 고통당한 예루살렘이여!
  • 문상호
  • 승인 2016.10.0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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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1장과 2장에는 어미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 비참한 어머니이다. 아이가 굶어죽기까지 아이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어미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그것은 그 어미들을 보며 통곡하는 예루살렘의 이미지로 확대된다.
애가 1장과 2장의 시적 화자는 어떤 여성으로 의인화된 예루살렘 자신이다. 비유컨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거민은 그녀의 자식들이라고 할 것이다. 어미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아이와 그 아이들을 보며 오열하는 어미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 자신의 겪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백성은 잔인하기만 하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 예루살렘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그들의 불행도 더욱 심해졌으며, 동시에 그들의 죄악도 더욱 극심해졌다. 애가 4장에서도 동일한 장면이 되풀이된다. 젖먹이들이 목이 말라 그 혀가 입천장에 들러붙어도 돌보는 사람이 하나 없다. 아마도 아기의 엄마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보다 좀 큰 아이도 먹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아이들의 부모도 아마 이미 죽은 이후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굶주리는 것은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평소라면 굶주림이란 단어의 뜻도 알지 못했을 것 같은 사람, 예루살렘의 귀족, 언제나 풍성하게 진수성찬을 누리던 사람들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극한 상황에서 가장 잔인한 죄악이 벌어진다. 인육을 먹는 것이 그것이다. 이미 죽은 시체의 인육을 먹는 일이 아마도 먼저 벌어졌으리라. 그러나 상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희생을 당했다! 아이들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어머니의 손에 살해당했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를 죽였으며 그들의 고기를 삶아서 먹었다!

기득권층이 보여준 죄악은 이윽고
전 백성에게 확대돼

유다왕국과 예루살렘의 죄를 고발한다는 점에서 선지자들의 견해는 일치한다. 그러나 여러 선지자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면 강조점이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발은 철저히 사회적 강자에게 맞추어져 있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였다. 그들은 목자의 역할을 맡아 양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을 잘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왕과 장로와 대제사장들은 바로 이런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세속의 여느 나라가 그러하듯,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과 귀족들도 오직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하여 사는 자가 태반이었다. 율법은 이스라엘 각 지파 모든 가족에게 공평한 기업을 약속했지만, 땅의 경계를 긋는 지계표는 세속의 폭력적인 힘에 의해 쉽게 옮겨졌다. 기득권층은 땅을 더욱 사고 집을 더욱 지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을 땅에 땅을 연하고 집에 집을 연하였다는 죄목으로 고발한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사 5:8, 개역한글)

에스겔 선지자 역시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을 고발한다. 목자는 본래 양을 보호하고 양을 잘 길러야 하는 직분이다. 그러나 유다와 이스라엘의 고위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자로 고발되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양의 기름을 짜는 자이며 양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만 살찌우는 자이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겔 34:2-3, 개역한글)

그러나 예레미야에 이르러서는 조금 강조점이 달라진다.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유다 왕국의 고위층의 죄악을 고발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모든 백성이 범죄했다고 외친다.

『그런데도 너희가
어떻게 나와 변론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모두 나를 배신하고 떠나갔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29, 새번역)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렘 5:1, 개역한글)

이는 마치 로마서 3장 23절의 가르침,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이 생각나게 한다. 아마도 처음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는 지배층에서부터 시작하였으리라. 그 당시에는 강자와 약자, 범죄자와 피해자, 죄를 범하는 자와 죄에 신음하는 자가 구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충만하면 점차 모두가 모두에 대해 죄를 범하는 시대가 온다. 죄를 범하지 않고 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 시대가 온다. 모두에 대한 모두의 악의(惡意), 모두에 대한 모두의 혐오, 모두에 대한 모두의 투쟁의 시기는 의외로 쉽게 올 수 있다. 

강자의 약자에 대한 억압은 강자들이 세운 틀이 무너진 다음에도 계속되었고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당한 상황에도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큰 희생을 당한 이들은 어린아이로 자신의 어미에게 살해를 당해 한 끼 식사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일은 사회질서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선지자들이 심판을 외치던 시기는 보통 사람이 볼 때에는 의외로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 시절이었다. 어디에나 조금씩 있는 범죄, 어디에나 조금씩 있는 불의, 어디에나 조금씩 있는 우상숭배, 잘 눈에 뜨이지 않는 죄악들…. 
그러나 그 속에서 선지자들은 죄를 발견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그들이 읽은 대로 모든 사람의 죄악이 드러나고 있었다.
애가 4장은 이런 죄악의 결과를 보여준다. 영광의 성읍,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있었다. 애가 4장이 그리는 극심한 굶주림이란 오랜 시간 동안 적군에게 포위된 정황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완전히 파괴되어 아무런 산업시설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모든 영광은 사라졌다. 더 이상 예루살렘의 옛 질서와 체계는 남아있지 않다. 예루살렘의 옛 질서의 틀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던 죄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그들은 혹시 죄를 회개하거나 적어도 죄의 무서움을 깨달았을까?
안타깝게도 강자의 약자에 대한 억압은 강자들이 세운 틀이 무너진 다음에도 계속되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당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큰 희생을 당한 이들은 아무런 힘이 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어미에게 살해를 당해 한 끼 식사로 전락해 버렸다. 아아, 죄인이여, 인간이여. 우리는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는 얼마나 악한 존재라는 말인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못한 성읍, 예루살렘

그 참담한 상황에서 시인은 차라리 소돔과 고모라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외친다. 죄인들의 도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순간에 멸망당한 성읍, 의인 아브라함이 그토록 중보하였지만 결국 살아남지 못한 도시, 그 악인의 땅이 오히려 예루살렘보다 더 나았을 것이라고 시인은 절규한다. 
그들은 비록 멸망당했으나 오래 동안 고통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떨어져 순간에 멸망당했다. 어미가 제 자식을 잡아먹기까지 굶주림에 시달리는 예루살렘이 겪는 고통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욱 처참한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처지에서조차 참혹한 죄악이 벌어지는 예루살렘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욱 악한 도시일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아마도 우리 자신을 돌아볼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과연 저 예루살렘보다 더 의롭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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