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나를 추적하시는 사냥꾼, 그가 나를 찢으시며, 나를 외롭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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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를 추적하시는 사냥꾼, 그가 나를 찢으시며, 나를 외롭게 하신다
  • 주일뉴스
  • 승인 2016.08.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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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고난당하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곧 좌절된다. 애가 3장의 하나님은 어둠과 사망으로 인도하시는 목자, ‘나’를 고난으로 포위하시는 분, ‘나’를 무덤에 던져 넣으시는 분, ‘나’를 감옥에 가두신 분이었다. 이제 하나님은 ‘나’를 추격하시는 사냥꾼이 되신다.

『주님께서는, 엎드려서 나를 노리는 곰과 같고, 
몰래 숨어서 나를 노리는 사자와 같으시다.
길을 잘못 들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외롭게 하신다.
주님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아서, 활을 당기신다.』 
(애 3:10-12, 새번역)

히브리어 알파벳의 네 번째 글자인 ‘ד’으로 시작하는 3개의 행, 즉 10절부터 12절은 사냥꾼이 되시는 하나님을 잘 나타내 보여준다. 하나님은 족쇄를 풀고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나를 추격하신다. 하나님은 마치 사냥을 위해 매복하고 있는 곰이나 사자처럼 나를 주목하시고 내 목숨을 노리신다(10절).
10절이 비유라면 11절은 보다 직접적인 표현이다. 11절에는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숨어 있는 맹수와 같으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3가지 일을 행하신 분으로 표현된다. 그는 나로 하여금 길을 잃어버리게 하셨다. 그는 내 몸을 조각조각 찢어버리셨다. 그는 나를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곰이나 사자 같은 맹수보다 더 무서운 분이시다. 그것들은 겨우 길가에 숨어서 먹이를 기다릴 뿐이지만, 하나님은 길 자체를 바꿔버리신다. 하나님은 나를 혼란스러운 길로 이끌어 들이셨고, 길을 잃어버리게 하셨다. 그 길의 마지막에서 만난 결말은 맹수를 만난 먹잇감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조각조각 찢겨져 죽었다. 
찢겨 죽은 자가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죽음에 갇혀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언제나 낯설고 두려운 것이다. 인생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예약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존재의 죽음을 목도한다. 가족 친지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 된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사건사고는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영안실과 화장장은 언제나 멈추지 않는다. 뉴스에는 지구반대편에서 일어난 전쟁, 자연재해, 테러, 사고 등으로 인한 대규모 죽음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죽음 그 자체를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죽음’을 볼 뿐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반드시 마주할 터이지만,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살아있는 주체가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모든 산 자 곁에 있는 친숙한 존재이지만, 죽음은 언제나 산 자에게는 영원히 낯설고 두려운 존재이다. 그래서 죽음은 영원한 외로움이다.
대부분 11절의 세 가지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고 이해하지만, 어쩌면 시인은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읽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읽기를 선택한다면, ‘나’는 집합적 개인이 된다.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은 어떤 ‘나’에게는 혼란 속에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나’에게는 맹수에게 찢겨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사건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나’에게는 다른 모든 이로부터 고립된 외로운 존재가 되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들이셨고, ‘나’를 찢어 죽이셨으며, ‘나’를 외롭게 하셨다!
애가를 기원전 587년의 예루살렘 멸망 사건과 연관시켜 읽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이 본문은 일차적으로 시드기야 왕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바빌로니아 군대에 포위된 예루살렘 성을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적군에 따라잡혔다. 그는 포로가 되었고, 자기 아들들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다. 그가 눈으로 본 마지막 일이 아들들의 죽음이 되도록, 바빌로니아 군대는 그의 눈을 뽑았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갔다.
시드기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의’라는 뜻이다. 공의의 하나님은 시드기야를 심판하셨고 시드기야에게 의를 나타내셨다. 그 결과는 이렇듯 참혹한 것이었다. 아마도 애가 3장의 최초의 독자들은 본문에서 시드기야 왕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연속적 읽기와 동시적 읽기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찢겨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시적 화자로서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나’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나’는 ‘나’의 죽음의 체험 이후에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나’의 또 다른 고난들을 노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월적인 자아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경험을 대표하는 집합적인 자아이기도 하다. ‘나’는 애가 1장, 2장의 의인화된 시온이 그러하듯, 만인을 대표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나의 경험은 어떤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냄새가 풍겨나는 현실적인 것이다.¹⁾ 
‘나’의 경험은 기원전 587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은 역사적, 집합적 기억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애가 1장 2장의 의인화된 시온과는 달리, 3장의 ‘나’의 경험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체험으로 묘사된다. ‘나’와 공명하는 독자의 경험은 공동체의 경험이지만 동시에 개인의 경험이다. 독자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 시를 읽어야 하지만, 공동체 속에서 ‘나’의 존재가 뭉개지고 잊혀서는 안 된다. 독자들은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히 개인으로서 이 시에 반응해야 한다.²⁾
사냥꾼이 되신 하나님은 나를 향해 활을 겨누신다. 나는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나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놀랍게도 다름 아닌 ‘나의 백성들’이 나를 조롱한다.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애 3:12-14)

‘내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14절의 고백은 11절의 마지막 일, 즉 하나님께서 나를 외롭게 하셨다는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내 백성들에게조차 조롱거리가 된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 속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한없이 외로운 삶일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외롭게 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본문의 ‘내 백성’이라는 표현은 ‘나’의 존재가 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인가? 혹은 단지 나와 같은 나라의 백성이라는 뜻인가? 전자로 읽는다면 ‘나’는 시드기야 왕에 가까워진다. 후자로 읽는다면 ‘나’는 예레미야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시인 자신이 될 것이다.
필자는 왕으로 읽기를 제안한다. 물론 본문의 ‘나’는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일 것이다. 애가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시인은 철저히 시적 화자들을 배치시켜 그들의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화자들의 발언이 시인 자신의 말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본문의 ‘나’는 어떤 왕이다. 그는 기원전 587년의 시드기야 왕과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애가 3장은 매우 의도적으로 기원전 587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시편의 수많은 탄식시와 같은 보편성을 유지한다. 이는 마치 본문의 ‘나’가 철저히 개인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집합적 자아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기원전 587년의 일차적인 시드기야 왕만을 떠올린다면, 시적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애가의 저자로 지목되었던 예레미야의 예언서에는 또 다른 시드기야(여호와는 나의 의이시다) 왕에 대한 예언이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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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신학 용어를 빌려오자면, 본문의 ‘나’는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은 이렇듯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서로 모순된 두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

【각주】 2)여기에 3장 11절이 갖는 두 번째 모순이 드러난다. ‘나’는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개인이다. 우리의 신앙 역시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개인으로 하나님께 응답해야 한다.

문상호 목사 / 기쁨가득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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