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받는 고난의 원인으로 하나님을 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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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받는 고난의 원인으로 하나님을 지목
  • 주일뉴스
  • 승인 2016.06.2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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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다시읽기 10

‘애 1:14’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를 재료로 하여 만든 멍에를 예루살렘에 지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애가의 시인은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 된 그들의 죄악을 인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가의 정조(情操)는 예루살렘의 죄악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겪는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 12절부터 17절은 이 모든 고통을 일으키신 분으로 하나님을 지목한다.

『주님께서 분노하신 날에 내리신 이 슬픔, 
내가 겪은 이러한 슬픔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12절, 이하 15절까지 새 번역)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 불을 보내셔서 
내 뼈 속 깊이 들어가게 하시고, 
내 발 앞에 덫을 놓아서 걸려
넘어지게 하셨으며, 
나를 폐인으로 만드셔서
온종일 힘이 없게 하셨다』
(13절).
『주님께서 내가 지은 죄를 묶고 얽어서 
멍에를 만드시고, 그것을 내 목에 얹어서 
힘을 쓸 수 없게 하셨다』
(14절).
『주님께서 나를 내가 당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14절).
『주님께서 내 청년들을 무찌르시려고 
내게서 용사들을 모두 몰아내시고, 
나를 칠 군대를 일으키셨다』
(15절).
『주님께서 처녀 유다를
술틀에 넣고 짓밟으셨다』
(15절).
『주님께서 사방에 있는 적들을 시켜서 
야곱을 치게 하셨다』
(17절).

이상의 모든 구절은 예루살렘 거민들과 유다왕국이 겪은 모든 환란과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예루살렘이 겪은 슬픔은 주님께서 분노하셨기에 내리신 것이다. 예루살렘에 심판의 불을 보내신 분은 주님이시다. 예루살렘에 덫을 놓아 넘어지게 하신 분은 주님이시다. 예루살렘을 폐인처럼 만드신 분은 주님이시다. 예루살렘에 멍에를 얹으신 분은 주님이시다. 예루살렘을 이길 수 없는 대적의 손에 넘기신 분도 주님이시다. 예루살렘의 용사를 모두 몰아내시고 적군을 이끌어 오신 분도 주님이시다. 유다 왕국을 술틀에 넣고 짓밟으신 이도 주님이시다. 사방의 적들에게 굳이 명령하셔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시다. 예루살렘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고발한다.
술틀에 넣고 짓밟는다는 표현이 눈에 밟힌다. 본문의 술틀이란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말한다. 수확한 포도송이를 넣고 짜서 포도즙을 만든다. 시인은 포도즙의 붉은 색에서 피를 연상한다. 포도를 틀에 넣고 짜면 으깨져서 포도즙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환란에 넣고 으깨셨다. 예루살렘의 거민은 짓이겨졌다. 그들은 포도즙 같은 붉은 피를 흘렸다.
포도즙의 붉은 색에 피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우리는 성찬을 통해 경험한다. 그것은 2천 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기억하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2천 년 전의 사건이지만, 영원한 현재로서 끝없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일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사랑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인간의 잔인한 폭력도 기억하게 한다. 놀랍게도 그 잔인한 폭력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대항하지 않으시고 폭력을 저지른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신다.
그러나 성찬의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는 일이라면, 지금 시인이 주목하는 술틀에서 흘러나오는 포도즙은 더 이상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기억하게 할 뿐이다. 더욱이 절망적인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이라는 사실이다.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고난을 당하는 인간 실존을 어우르는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모든 상황에 응답할 수 있는 만족스런 설명은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러한 설명 중 가장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죄인은 반드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많은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회개를 외쳤다. 이스라엘이 가장 강성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도,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한계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범죄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그들이 강성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인간의 그 어떤 탁월함으로도 이것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과연 선지자들의 예언은 성취되었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멸망을 당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도 약점이 있다. 이런 관점은 모든 고난당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만든다. 고난당하는 자는 남모를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그렇지 않아도 고통스러운 이를 더욱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포로 공동체는 이렇게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 우리의 조상이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통의 나날이 충분히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조상의 죄 때문에 왜 우리 자녀가 고통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으십니까?”
어떤 이들은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교육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신다. 어느 시편의 기자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성장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분이다. 잠시 겪는 고난이 비록 견디기 힘들 지라도 이것은 우리를 정금같이 아름답게 할 것이다. 
이런 견해가 때로는 성경의 지지를 받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했던 삼십 팔년 된 병자를 생각해 보자. 어떤 이는 그의 신앙 없음을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권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수십 년을 고통 속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에게 그런 말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복잡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직 그를 고쳐주셨다. 
예루살렘은 자기의 청년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기의 아름다운 처녀가 폭행을 당하는 일을 겪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치욕을 당하며 죽었다. 어린아이들마저도 기아와 전쟁에 죽었다. 만약 이 모든 일이 단지 교훈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런 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만약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교훈하시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무능하시기에 이런 참혹한 방식으로만 교훈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따지고 보면 이상의 모든 주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일정 부분 포기하려는 것이다. 그런 주장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분명 사랑이시지만 그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과 다르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랑하듯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는 옳은 주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고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더 나아가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감정이 없으신 분으로 폄하하지는 않는가?

그래서 이런 견해에 도무지 동조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쪽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어느 정도 포기하거나 수정하려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의 범주 안에서는 하나님은 피조물의 선택을 존중하신다. 피조물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간섭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를 보고 그 아이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위해 가만히 내버려 두는 부모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고난 중에 있는 이를 향해 하나님의 정당성과 사랑을 주장하려는 노력은 헛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하나님 자신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시지 않는다. 오히려 죄와 고통에 빠져 있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죄와 고난을 담당하셨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라고 하나님을 고발하는 이스라엘의 노래가 성경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오히려 고난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시는 이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일 것이다. 

문상호 목사 / 기쁨가득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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