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는 연인들의 시가 아니라, 다윗 왕조의 왕들에게 헌정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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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연인들의 시가 아니라, 다윗 왕조의 왕들에게 헌정하는 시
  • 주일신문
  • 승인 2015.01.2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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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는 아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여러 견해와 관점을 검토해 보았다. 이제부터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가 본문 읽기에 도전하고자 한다. 우리는 아가를 어떻게 읽어 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가 읽기의 전략
 
일단은 본문의 성격이 서정시라는 점을 존중하기로 하자. 어떤 주석가는 본문을 드라마로 읽을 것을 권한다. 우리는 앞서 욥기를 그런 식으로 읽어 나간 적이 있다. 비록 당시에 희곡이라는 장르가 이스라엘에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욥기를 무대 위에 올린 드라마로 읽었다. 아가도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아가는 비록 그 장르가 서정시(抒情詩)이지만, 연인들의 사랑과 고난, 그리고 고난을 극복한 사랑의 승리라는 일관된 한편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읽는 것은 아가의 ‘통일성’을 강조한 읽기이다. 따라서 아가는 한편의 드라마이므로, 일견 모순되어 보이고, 토막토막 끊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본문들이지만, 그것은 일관된 줄거리가 있는, 통일성 있는 한편의 이야기로 해석된다. 또한 본문의 미묘한 시어들은 드라마의 각 장면을 나타내는 일종의 장치가 된다. 거기에는 각종 복선(伏線)과 위기에 대한 암시(暗示) 등이 미묘하게 녹아 있는 것으로 읽힌다. 이렇게 읽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드라마로서의 읽기를 선택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읽으려면 우리는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에 나타난 단서들을 추리하며 읽어야 한다. 이것은 아가 본문의 통일성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시도일 수도 있지만, 정작 시어 특유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될 위험이 크다. 
우리는 아가를 서정시의 모음집으로 읽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과는 달리 아가는 마치 한편의 통일성 있는 드라마처럼 보이도록 고도의 편집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뮤지컬을 감상하듯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가에 억지로 통일성을 부여하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모순과 마디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만 아름다운 본문 그 자체에 주목하려 한다.
이렇게 읽는다면 아가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때때로 연인에 의해 ‘왕’이라고 불리는 어떤 남자와 술람미 여인으로 알려진 어떤 여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정작 솔로몬 왕인 것처럼 보이는 그 남자는 실은 솔로몬이 아닌 것 같다. 8장 끝부분은 솔로몬보다 우리의 사랑이 더 우월하다고 자랑하는 것 같다. 솔로몬인 것처럼 보이지만, 솔로몬이 아닌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이 아가를 두 주인공의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혹은 세 사람의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게 만든다. 우리는 대체로 두 주인공의 이야기로 읽기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대안적인 세 사람의 이야기로 읽기에 잠시 한쪽 발을 걸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때로는 교회와 그리스도 혹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에 관한 유비(喩比)에 관심을 기울이겠지만, 억지로 어떤 틀에 끼워 넣으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가는 지혜문학에 속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여러 성품과 특성 중에서 유독 사랑은 소위 거룩하다는 사람에게서나 방탕한 사람에게서나 편견과 왜곡된 시선으로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사랑이 본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에 대한 아가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가를 사랑에 대한 노래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솔로몬의 아가
 
한글성경은 아가 1장 1절을 ‘솔로몬의 아가’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은 정작 아가 본문이 아니라, 시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표제다. 표제는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지침이다. 그러나 애초에 시인이 붙인 제목 같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시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사용해 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장 1절을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아름다운 시를 솔로몬과 연결시켜서 이해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의 아가’라는 표현은 꼭 솔로몬이 저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시를 솔로몬의 저작으로 이해했다는 표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솔로몬을 위한’ 시이거나 ‘솔로몬에 관한’ 시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아가의 거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8장 10절과 11절은 솔로몬을 조롱하거나, 솔로몬에게 교훈을 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은 많은 왕비와 후궁이 있었지만, 결코 아가의 주인공과 같은 사랑을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시는 마치 잠언의 일부분이 아들에게 교훈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솔로몬’으로 대표되는 왕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시로 읽을 수도 있다. 남왕조와 북왕조를 통틀어서 이스라엘이 가장 영화로웠던 시기의 왕인 솔로몬 왕이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했다면, 그 후예는 더욱 사랑 앞에 진실하고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가 8장 6~7절은 이렇게 이해하는 관점을 더욱 지지하는 것 같다.
히브리어성경은 아가를 잠언과 룻기에 이어 그 다음에 위치시켰다. 잠언은 현숙한 여인을 얻으라는 격려로 끝나고, 룻기는 현숙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룻기의 주인공이 되는 연인은 룻과 보아스이고, 그는 다윗의 할아버지뻘이 된다. 그리고 아가는 솔로몬에 관한 시(詩)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단순히 연인들의 시가 아니라, 다윗 왕조의 왕들에게 헌정하는 시이다. 오히려 이스라엘 시골의 민속 노래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이 아름다운 노래는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공적 신앙과 연결이 된다. 자, 솔로몬에게 헌정하는, 혹은 솔로몬에 관한 이 시는 무엇을 노래하는지 살펴보자.
 
내게 키스해 주세요
 
나에게 입맞춰주세요,
숨 막힐 듯한 임의 입술로.
임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
임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내음,
사람들은 임을 쏟아지는 향기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아가씨들이 임을 사랑합니다
(아 1:2-3, 새번역).

 
아가는 격정적인 여성 화자의 노래로 시작한다. 여인은 연인에게 키스해 달라고 속삭인다. 무엇이 이 여인을 이토록 애타게 하는가? 그는 연인을 향한 격렬한 사랑에 빠져 있다. 아가 1장에는 연인을 향한 조심스런 접근이나 두려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 여자는 처음부터 그 남자에게 푹 빠져 있다. 그 남자의 키스는 숨이 막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여자는 이미 그 남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다.
사람들은 그 남자를 가리켜 향기로운 기름이라고 부른다. 개역성경이나 다른 영어성경은 그 남자의 이름이 깨끗한 기름과 같다고 함으로써 이름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남자는 명예로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수많은 아가씨가 그 남자를 흠모한다. 
그 남자에게 많은 연인이 이미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이 될 것이다. 3절의 후반부는 아마도 그 남자가 매우 인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많은 여성이 흠모할 만큼 그 남자는 명예로운 이름을 가졌다.
이것은 그 여자가 그 남자에게 얼마나 깊이 빠졌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어떤 여자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하고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두려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나 같은 여자가 사랑하기에 너무 뛰어난 남자가 아닐까’ 하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여자의 밀어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하자.

문상호 목사 / 기쁨가득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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