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언의 천지만물-365] 사명의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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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언의 천지만물-365] 사명의 재건
  • 주일뉴스
  • 승인 2020.07.1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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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근처에 누가 있나? 있어야 할 제자들은 도망가버렸다. 뉘 있나? 네 명의 군병들, 큰 무리의 여자들, 예수 모친과 제자 요한, 두 명의 강도 등. 이들은 사명을 가진 자들은 아니다. 제자들이야말로 사명을 가진 자들인데, 이곳엔 없다. 그러나 성경은 흑암이 자욱한 그곳에 사명이 꿈틀대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 사명을 일깨운다.

성락교회의 김성현 감독은 느헤미야의 마지막 말인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13:31)을 강조하며, “그가 이스라엘 교회를 재건하는 것을 최고 사명으로 여겼던 것을 주께서 기억해달라고 했다. 이어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사명이요, 사명만큼 중요한 것이 교회다. 우리의 직분, 우리의 사명, 우리의 운명은 성락교회라고 했다.

그토록 가까이에서 예수의 땀방울과 피까지도 보았건만, 채찍 받는 현장과 빌라도와의 담화까지 들었건만, 군병들은 옷을 제비 뽑는 일에만 몰두했다. 우주의 역사상 가장 놀랍고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건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네 군병. 허나 이들도 시편의 사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니....

예수가 얼마나 놀라운 이적들을 많이 베풀었나? 성경을 풀어주며 마음이 뜨겁게 하는 등 감동을 주지 않았나?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그 놀라운 현장에 있음에도 옷을 제비 뽑는 세상 것에만 몰두해 있다. 이는 재리와 일락에 기운 막힌 세인(世人)들의 불쌍한 사명을 말한다. 군병들의 이 사명은 세인들의 사명이며, 시편의 예언이다(22:18).

이제 여인들이다.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세속에만 관심 가졌던 군병과는 차원이 달랐다. 도망간 제자들보다도 낫다. 적어도 여인들만큼은 우리 신앙이 좇아가줘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선 이들에게도 사명을 주신다. 자신을 향하여 조금의 동정도 보내지 말라신다.

예수 십자가에 달리심에 대해 일말의 안타까움도 갖지 않는 것은 사실 매우 중요한 신앙이다. 그분은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가신, 동정받아야 할 길이 아닌 최고의 영광의 길을 가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슬퍼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경계해야 할 신비주의다.

큰 무리의 여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훑어보면 포로기 등 국난 속에서 항상 미래세대를 키워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름을 아는가? 그들은 다니엘의 친구들이다. 어릴 적 타국으로 끌려갔으나, 실상은 미래세대로 준비된 자들이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미래세대로 준비한 양녀(養女)였다. 역경 속에 열쇠가 있고, 광야 속에 교육이 있음이 바로 사명이었다.

강도 두 명도 가까이에 있다. 한 강도의 강점은 제 죄를 깨달음에 있는 것보다, 예수를 의인으로 고백한 그것에 있다. 천하가 예수를 모른다 하며 떠나거나 비방하는 형장에서 오직 그만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제자도 모친도 어느 누구도 입 벙긋하지 않는 그 현장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는 마지막 순간, 최고의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무언은 그는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 아닌..., 예수에 대한 권위를 전적으로 달리 보며, 아주 높이고 있다. 아무도 시인하지 않을 때, 그는 천사들도 놀랄만한 권위를 예수께 돌리고 있다.”라고 했다. 이게 강도의 사명이다. 모진 고난과 핍박 중에도 바로 이때 예수의 주인되심을 증거하고, 목 베임을 받을지라도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 강도의 사명이다. 분쟁 중의 교회라도 끝까지 교회를 수호하고 재건하려는 그것과 맥이 같다.

이제 남은 자는 예수 모친과 제자 요한이다. 요한에게 모친을 돌볼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단지 반포지효(反哺之孝)를 말한 것일까? 스데반과 야고보 등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요한이 듣고선, 자신의 신세 혹은 예수의 말씀에 한탄했을 것 같다. 자기도 순교할 만큼 전도하고 헌신하고 싶지 않았겠나? 그러나 특별히 자기에게만 부탁한 예수의 마지막 계명인 이 사명을 거역할 순 없었다.

요한은 꽤 독특하다. 공관복음과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성령의 본질과 역할의 치밀함을, 또 가장 영적인 내용이 가득하게 글을 썼다. 삼서까지의 서신은 물론, 계시록까지 대단한 영감의 글들이다. 왜 그럴까? 모친 마리아를 모셨기 때문이다. 모친은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뼛속까지 잘 아는 자다. 반포지효의 이 계명이 사명이 되었기에, 요한을 통한 무수한 영감은 시무언에 도달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함께, 성락교회의 근간이 여기에 있다.

경륜은 꺾이지 않는다. 사명은 부지불식간에 달려간다. 십자가 앞에 모인 자들이 그 사명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사명은 역사에 진군한다. 십자가 앞에 많은 자가 있었으나, 최고의 사명을 알고 최대의 사명을 완수하는 자가 있다. 누군가? 그는 운명했지만, 사명은 완수됐다. 그에게 계명으로 주신 사명은 신유나 축사, 오병이어나 물 위를 걷는 이적이 아니었다. 피를 뿌려 죽으시는 그것! 그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이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다. 모든 자가 사명도 모르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때, 오직 주 예수께서만 아버지의 사명에 집중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성락인 어떠해야 하나? 교회분쟁과 코로나19 앞에서, 또 미래의 어떤 환란 가운데에서도 성락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잊어버리지 않고 재건하는 그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나.

참조: 201911월 주일설교 등

|그림: 박한상 목사(월산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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