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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목사(한국교회건강연구원)3ㆍ1운동 100주년을 보내며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중 대표적 목회자를 꼽으라면, 함태영(연동교회)ㆍ전덕기(상동교회)ㆍ신석구(수표교교회)ㆍ손정도(동대문교회)ㆍ현순(정동교회) 목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 땅에 진정한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기를 바랐던 열렬한 애국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과 사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특히 상해(上海)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4월에 기독교가 중심 되고 주도하였던 상해 임시정부수립에 있어 상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ㆍ현순 목사 등을 기억하므로 이름없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고뇌와 열정, 독립을 위한 헌신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공로자 중 현순(玄楯) 목사는 하와이 이민사에 있어 막중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현순은 1880년(고종1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6년 선교사 무어가 설립한 승동교회에서 처음 윤치호의 설교를 듣게 되고, 일본 유학시절 1901년 친구를 따라 YMCA 성경반에 들어가 공부한 후 도쿄의 제일침례교회에 들어가 찰스 피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그는 관립외국어학교에서 공부한 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으로, 인천 내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독립협회를 거쳐 1902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주도한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민에 깊이 참여한다.△임시정부 국무원으로 앞줄 왼쪽 신익희.안창호, 현순목사가 있다.1907년 하와이에서 귀국한 현순은 1909년 전덕기, 최병헌 등과 감리교 협성신학교 제1회를 졸업한 후 배재학당과 상동청년학원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며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서울의 대표적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면서 1914년에는 전국을 순회하는 부흥사로 활약하였다. 현순 목사는 부흥회와 복음전도라는 장(場)을 통해 기독교와 민주주의 정신을 가르침으로써 장차 한국민이 일본으로부터 독립 할 수 있도록 영적·정신적 능력을 배양하고자 했다. 인재양성을 위해 현순 목사는 서강(西江) 창전리(倉前里)의 의법학교(醫法學校)의 교장으로 1918년『영어입문(英語入門)』을 출간하였다.100년전, 1919년 2월 19일 현순 목사는 당시 김필수 목사의 권유로 3ㆍ1운동 모의에 참여한다. 다음날 함태영 목사 등 운동 지도부는 영어를 잘하는 현순 목사를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3ㆍ1운동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2월 24일 그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용산역을 떠나 3월 1일 상해에 도착,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서방 세계에 타전하였다. 그 뒤 중국 상해에 밀파되어 평화회의의 주도자인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과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어 동양평화유지에 있어 한국의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여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에게 한국독립을 찬성하도록 고조하는 한편, 한국과 파리와의 통신연락을 취하였다.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의 독립지사가 상해에 모이자 이광수·선우혁 등과 함께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에 임시독립사무소를 개설, 총무로 위임받아 각국에 독립선언서를 발부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 개최된 국내 13도 대표의 국민대회에서 결의한 각원(閣員) 명단에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같은 해 4월 11일 상해에서 손정도 목사 등 29명과 함께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조소앙·남형우·이시영·한기악 등이 기초한 임시헌장 10개조를 통과시킴으로써 4월 13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외무차장으로, 그 뒤 정부의 조직개편으로 외무위원에, 8월 5일 내무부차장에 임명되었고, 9월 20일에는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노령(露領)·만주 등지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고 귀환한 뒤 11월 14일 내무부차장직을 사임하였다.그 후 1920년 4월 21일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안현경과 함께 상해를 떠나 미국 뉴욕에 도착, 구미위원부 위원장서리에 추대되어 외교공세를 펴기도 하였다.△상해 임시정부 수반 백범 김구선생(앞줄 우측 두번째)과 애국지사들.1922년 7월 안창호·이동녕·김구·차이석·여운형·이시영·노백린·홍진 등 10여명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외곽단체 중의 하나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주요간부로 활동하였다.이렇게 현순 목사는 3.1운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연결시킨 가교적 인물이었고, 통합 정부의 출범에도 남다른 기여를 하였다.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1930년대에는 하와이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민족진영의 대본영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941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 시기 그는 중한민중동맹단과 조선민족 혁명당 하와이총지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좌우 연립정부의 구성과 직접적인 군사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후 신국가의 체제가 미국식도 아니고 소련식도 아닌 한국식이어야 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주창한 것이다.당시 한국교회사 속에서 현순 목사 같은 독립운동가로 지성과 영성을 소유한 실력있는 부흥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의 저서『현순자사(玄楯自史)』와『영어입문(英語入門)』은 기독교자료만이 아니라 근대 역사 교육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3·1운동 직전에 상해로 망명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조국독립을 위하여 세계를 한 바퀴이상 돌며 분투했던 목회자 현순,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1968년 소천했다. 그리고 10여년 후 1975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었다. 해방된지 30년이 지나 조국의 땅에 묻혔다.

칼럼 | 채수빈 | 2019-03-27 21:17

△김고현 목사(한장총 총무)"밭에 난 잡초는 뽑으면 그것으로 거름이 되듯이 사람의 고민도 그 잡초와 같은 존재이다. 뽑지 않고 내버려 두면 무성하여 곡식을 해롭게 하지만 서둘러 뽑아 버리면 곡식은 잘 자란다. 그리고 뽑은 잡초는 따로 거름이 될 수 있다. 논과 밭에 잡초가 자라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뽑아버릴 힘은 있지 않은가?"채담근에 실린 글이다. 채근담는 1644년경 명나라 말기 홍자성이 쓴 책으로, 간소한 삶 속에 진정한 인생이 있음을 힘주어 말한 잠언집이다. ‘채근담’이라는 제목은 ‘감자나 무우처럼 맛있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이 책은 처세 잠언집으로서 359개의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집 상권에 225개, 후집 하권에 134개로 짜여져 있다.한 철학자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마지막 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가 빙 둘러 앉았다. 철학자는 제자 한 사람 한사람에게 물었다."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판에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잡초를 모두 없앨 수 있겠느냐?"제자들은 학식은 뛰어 났지만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건성으로 대답했다."삽으로 땅을 갈아엎으면 됩니다."//"불로 태워 버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뿌리째 뽑아 버리면 됩니다."철학자는 제자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이것은 마지막 수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 한대로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거라. 만약 잡초를 없애지 못했다면, 일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자."일년 뒤, 제자들은 무성하게 자란 마음 속 잡초 때문에 고민하다가 다시 그 곳으로 모였다. 그런데, 예전에 잡초로 가득했던 들판은 곡식이 가득한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런 글귀가 적힌 팻말 하나만 꽂혀 있었다."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뿐 이다. 바로,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자라는 잡초는 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을 실천할 때 뽑아 낼 수 있다."그렇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음속에 혹시 잡초가 자라고 있지 않나 자신을 살펴보고, 아니면, 이미 무성하게 자라서 마음속에 잡초가 빼곡히 채우져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바로 지금, 따뜻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해보자. 따뜻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하다보면 어느새 마음의 잡초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정"과 "사랑"의 곡식이 풍성하게 열릴 것이다. 성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뽑아 버리라고 했다.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잡초를 뽑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열매를 통해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 풍성한 열매는 혼자 맺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맺을 수 있다.

칼럼 | 채수빈 | 2019-03-19 21:31

△이효상 목사(한국교회건강연구원)최근 모 언론사가 설문조사한 자료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가장 존경하는 역대 목회자와 차세대 지도자 설문이었다.성도들은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역대 한국교회 목회자 중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는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한경직(11.2%)·옥한흠(10.6%)·주기철(9.9%)·손양원(9.2%) 조용기(4.7%)·장경동(4.6%)·문익환(2.8) 목사 순으로 7인을 꼽았다. 하지만 28.5%는 ‘없음·모름·무응답’이라 답했다.역시 주기철·손양원 목사는 한국교회의 자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설문조사에서 한경직·옥한흠· 조용기 목사 이후 주목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교계에서 30여년을 다양한 계층의 지도자들을 만나다보니 혹 대중의 인기가 꼭 좋은 리더십이라고 말하긴 뭐하다. 인기발언으로 인기만 얻고 한국교회를 위한 공공성과 헌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어느 단체나 두 가지 부류의 리더가 있다. 하는 일은 없어도 시간만 때우며 자리와 인기만 차지하려는 사람과, 반대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존경받는 리더는 후자이다. 이런 리더가 없으면 조직은 결국 쇠퇴하고 망하는 길을 걷게 된다.리더는 한 순간의 인기와 자리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먼 미래를 보고 가야 한다. 그가 리더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설문조사에서 빠졌지만 장종현· 이영훈· 정성진· 윤보환 목사 등과 같은 좋은 지도자들도 있다. 오랜 교계 생활에서 만난 사람 중 이들을 보면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인지 그들을 오해하거나 평가절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또 설문조사에서는 ‘한국교회 목회자 중 공적 교회를 지향하며 사회와 교회 연합, 일치를 만들어 낼 차세대 지도자(60세 이하)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성도 62.1%, 목회자 74.2%가 ‘없음/모름/무응답’이라 답했다.이렇듯 ‘한국교회’라는 모판에서 좋은 지도자 나오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다. 최소 10년 아니 2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좋은 지도자로 세우기가 어렵다.설문조사에서 미래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 부분에서 가능성을 보인 소수 답변으로 성도들은 이찬수 목사(5.8%), 목회자들은 소강석 목사(8.1%)를 가장 많이 꼽았다.그 외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자천 타천 거론 되었지만 검증이 안되어 낮설고 생소한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에 뚜렸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지도자가 나지 않는 한 교회의 번창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리더십과 리더의 한계가 있다면 상대가 나와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있다.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하다. 교회는 지금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 마땅한 지도자가 없는 리더십 공백의 상황이다. 개 교회나·기관·연합기관까지 지금 당면한 문제는 일회용 이벤트대행 지도자가 아닌 미래를 이끌 리더십을 지닌 차세대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는가 이다.그런가하면 지도자로 거론되는 이들도 교회가 조금만 성장하면 나홀로 독자생존의 길을 가려한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가 당면한 현실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자신들이 쳐놓은 교회담과 울타리를 넘어서질 못한다. 그것이 주는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한국교회는 안팎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대사회적 역할 수행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개인기에 취해서인지 ‘연합’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어 진다. 그래도 가끔은 ‘연합’을 하기도 한다. 각자의 이해타산이 맞을 때만 말이다.앞으로 미래지도자의 필수 전제조건은 ‘연합을 실천할 능력‘이다. 이런 마인드가 없으면 대표나 총회장, 대표회장이라는 자리를 그만 둬야 한다. 연합할 줄도 모르면서 존경받는 지도자란 먼 나라 이야기이다. 개인기 말고 동역자의식이나 형제애를 가지고 교회와 역사의 시대정신을 읽으며 팀웤을 이룰 수 있는 자이다.이번 조사에서 ‘젊은세대의 이탈’로 대변하는 다음세대 문제와 더불어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풀어 나가야 할 과제중 하나로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간 양극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다’(92.3%)고 응답한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다음세대’와 ‘양극화’의 문제는 교회와 동역자의 생존이 걸린 목회생태계의 최우선의 과제이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필자가 교계생활에서 만나보고 생각나는 가장 존경할 만한 목회자라면, 고인이 된 이중표 목사, 현재 원로인 장차남· 림인식 목사나 나의 멘토 박종구 목사처럼 신앙인격과 삶이 아름답게 조화된 목회자를 꼽고 싶다. 또 오랜 세월 연합운동에서 섬김으로 분열된 교회의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며 소외된 자를 품은 한경직 목사처럼 그런 통합형 지도자를 요즘처럼 갈급해 한 적도 없다.한국교회 전체를 읽고 사회와 소통시키며 다음세대를 이끌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역사와 미래, 세상과 사람을 품고 양극화를 치유하며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보려는 리더십도 보이질 않는다.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칼럼 | 채수빈 | 2019-03-11 20:45

△김고현 목사(한장총 총무)어느 목사님은 주일날 강단에서 "우리는 재물의 청지기이다. 재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지금 우리는 그것의 관리자일 뿐이다. 물질의 소유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도록 하나님은 십일조와 헌물 제도를 허락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도록 열에 하나를 구별하여 드리도록 하셨다. 이 모든 것을 맡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스런 마음이다"라고 설교했다.유한양행의 설립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유일한 박사를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존경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나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유 박사는 한국에도 좋은 공업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1970년에 유한교육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직업교육기관인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대학교을 세웠다.유 박사는 유언장에서 “자기 명의로 된 주식 전부를 한국사회 및 교육기금으로 기증하게 하고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하여 살아가라”는 당부의 글을 나겼다. 그의 딸인 '유재라'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비롯하여 전 재산 205억 원을 공익재단에 기부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요즘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변화 중, 재능 혹은 달란트 기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반인들도 우리의 시간이나 노력을 기부해 더 좋은 사회로 만들어 나간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이다.자신에게 있는 재능이나, 물질을 이웃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사회에도 희망이 보인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따라서 빈손으로 가야 한다. 많은 재산을 남긴 부자들을 보면, 재산을 놓고 형제끼리 싸우는 모습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성경말씀이 머리를 스쳐간다.어떻게 보면 재능도 사회가 우리의 재능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물질도 빈손이었던 우리를 사회가 인정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 우리의 재능이며, 물질을 사회가 인정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사회 안팎의 수많은 기부자들이 재능이라고 세상에 환원하는 것들은 큰 틀에서 보면, 그 목적만 바로 선다면, 결국 하나님께 환원하는 것이 아닐까.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청지기로 주신 사역과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우리에 작은 재능을 기부하는 줄 믿어야 한다 그리하면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는 소망이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한다.

칼럼 | 채수빈 | 2019-03-06 20:05

△김고현 목사(한장총 총무)침례교 목사이자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하며, 비폭력 평화운동을 주창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의 네 자녀들이 나와 같은 차별을 받지 않고 살아가며, 피부색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능력과 자질만으로 평가받게 되기를 바라는 꿈입니다”라고 말했다. 킹 목사의 이 말은 세계적인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옛날에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취미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이었다. 정원에는 남자의 손에 의해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로 가득했다. 어느 날 정원 걷다가 한구석에 핀 민들레 한 송이를 발견했다. 남자는 그 민들레가 자신의 정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들레는 그 정원에 허락받지 못한 꽃이 되었다. 남자는 민들레를 뽑아버렸다.그런데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민들레 씨가 자꾸 정원에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남자는 계속 민들레를 뽑아버렸다. 하지만 민들레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참다못한 남자는 제초제를 뿌리려고 했다. 남자가 제초제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이웃집 사람이 말렸다."그만 두시요. 제초제를 뿌리면 당신이 사랑하는 다른 꽃과 나무들도 다 같이 죽어 버릴 것입니다""그러면 이 민들레들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가령 저기 정원이 당신의 가정이라 합시다. 그곳에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 셋이 있으면 그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겠습니까?""무례하군요. 그 아이들은 셋 다 내 자식이고 나는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합니다."그러자 이웃이 웃으면서 말했다."민들레도 당신의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인데, 그렇다면 그 민들레도 장미와 수국처럼 똑같이 사랑하도록 노력해보시요."자아(自我)는 때로는 위험하다. 자아는 스스로 자신의 존엄과 자부심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에도 자신의 취향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차별하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하기도 한다. 자아는 정신분석이론에서 '자기' 또는 '나'로서 경험되며 지각을 통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인간성격의 일부분이다. 장미든 민들레든 저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취향에 따라 아름다움에 차별을 두고 선을 긋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 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 가족과 이웃에 대해 오만한 기준을 두고 차별해서 안 된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로 동행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한다.

칼럼 | 채수빈 | 2019-02-18 23:06

△이효상 목사(한국교회건강연구원)드라마같지 않은 삶의 여정얼마전 구한말 의병 조직의 태동과 확산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항일 무장투쟁사가 재조명되었다, 드라마를 보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며 총을 쏘는 선구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멋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독립된 나라의 꿈을 오늘 우리는 맛보고 있다. 이 드라마는 위기의 나라를 구하러 나선 민초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재소환하여 의병 활약과 선교사들의 역할을 본격 다루며 개화기 주체적 여성의 모습과 함께 친일·매국 문제를 오롯이 새겨 젊은 시청자에 강한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드라마는 드라마였다. 이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이나 영화 ‘밀정’처럼 결코 멋진 일이 아니었다. 일제의 핍박에 맞서 쫓겨 다니면서 한시도 편히 잠들 수 없는 상황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사람들의 냉대를 받으며 36년 이상을 버텨야 하는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이었다.항일의병운동의 시작19세기 일제는 대한제국의 개항을 강요하고 불평등 조약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그분만 아니라 우리의 자원과 식량을 실어 날랐다. 이런 경제수탈만이 아닌 정치 군사적 식민지화는 더 노골화되어 갔으며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도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야만 했다.그리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항일전선의 첫 출발이라는 점에서 분명 ‘항일의병운동’의 시초라 할 수 있다.1895년 일제는 낭인들의 손에 칼을 들려 궁중을 침입하게 하고 명성황후를 죽이고 시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꼭두각시 정권의 하수인들을 통하여 상투를 자르게 하고 단발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유림이 중심이 되어 의병들이 확산되었지만 유림이외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그 이유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평민들의 피해가 워낙 컸고 이들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힘의 결집을 가져오지 못하였던 탓이다.1095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외교권까지 박탈하고 이어 군사·경찰권까지 앗아갔다. 대한제국은 이름뿐인 껍데기가 되었다. 쌀같은 식량은 빼앗아가고 대신 기계로 짠 옥양목을 수입케하므로 농민경제는 식민지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의병들은 예전과 달리 유림을 비롯하여 벼슬아치, 농민지도자, 포스 등 다양한 모든 계층이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의병들은 단지전이 아닌 지구전을 벌였다. 도시에 출몰하기도 하였지만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유격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제의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병들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중심지로 삼아 활동을 다양화 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무기와 식량부족과 일제의 강력한 화력과 포위작전에 버티거나 더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병들은 전국적으로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한때 남한산성에 모여 서울 침공 작전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수많은 의병들은 문경세재와 지리산 골짜기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갔고, 임진강과 낙동강 물에 시체가 내던져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나 둘씩 의병부대가 해체되거나 이동하면서 일부는 의병운동의 기지를 만주일대로 옮겨가기도 하였다.1907년 8월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가장 극렬한 저항운동이 일어난 곳이 강화였다. 강제 해산 당한 이곳의 구 대한제국의 진위대가 일본군과 조직적인 저항을 벌였던 것이다. 이곳 의병운동을 지휘한 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등은 과거 이동휘 장군 휘하에 있던 장교들이었다. 강화읍 잠두교회 교인이었던 김동수와 그의 동생 김영구, 그리고 사촌인 김남수 등 삼형제가 일진회원의 지목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기도 이천 지역에서도 민심이 술렁대기 시작하자 일본군 헌병대가 즉각 진주하였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덕뜰교회와 24개 예배처소를 돌보는 구연영 전도사와 그 아들 전도사 구정서를 체포 주민들이 보는 소시장 미루나무에 묶고 공개 총살하였다. 1907년 8월 24일 구연영 44세, 아들 구정서 25세였다. 성직자로 첫 순국자가 나오는 순간이었다.또 안중근의사는 27세에 자기 재산을 모두 털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지성을 겸비한 지식인이었으며, 스스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항일 의병전쟁을 감행한 의병대장이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과 만주 분할지배를 협의하려고 1909년 10월 만주를 방문하게 되자, 자기의 활동 지역에 들어온 적 수괴에 대한 의병 작전의 일환으로 이토를 처단하였다.이런 민족적 수난에서 기독교의 항일운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다. 경제적 ‘납세거부운동’과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등만이 아니라, 한글운동, 야학, 농촌계몽, 여성운동 등 합법적인 방법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곳이 기독교 교회와 사립학교였다.당시 교회가 망국의 울분을 달래는 구국기도회 등은 종종 열었으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교회를 보호 유지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선교사들은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려 했고 ‘정교분리’를 내세움에 따라 무력항쟁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그러나 신앙을 통해 민족과 조국을 재발견한 열사들은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 군병'이라는 구국적 신앙으로 결단하고 무장한 소수의 사람들이었다.독립투사들의 치열한 독립운동의 전개1910년 8월, ‘병합’으로 대한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어 한민족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화하였다. 이때부터 독립투사는 그 이전의 의병과 확연히 구분된다.또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삼천리 금수강산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라는 노래를 부르며 옷고름을 다잡았다. 이렇게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립운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와 일제의 관청과 군부대를 습격하는 일이었다.1920년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연합 독립군은 두만강 건너 봉오동에서 일본군 수백명을 유인하여 몰살시켰고 이어 백두산 줄기인 청산리와 어랑촌에서 홍범도, 김좌진, 이청천 등의 연합독립군으로 일본군 천 여명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연출한 청산리전투의 영웅적 활동상을 알고 있다. 이들은 무장활동에 그치지 않고 국내의 인재들을 모아 군인양성의 무관학교를 열고, 탄압을 피해 넘어온 동포들에게 농토를 개간하게 하였고 가르칠 학교를 세워 나운규, 윤동주, 문익환 같은 인물들이 명동학교를 통하여 배출되었다.이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생업을 꾸리고 생업을 결과를 가지고 독립항쟁을 동시에 벌였다.그러나 일제는 만주의 괴뢰정권과 손잡고 우리 동포와 독립군들을 무수히 죽였다. 남은 독립군들은 산 속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싸웠고 나머지는 러시아 땅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부는 중국본토인 북경과 상해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먼저 독립운동의 기지를 만든 이가 신규식, 박은식과 같은 독립투사들이다.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이 급진적인 무력항쟁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을사조약 이후부터다. 그러나 교회조직에 매이지 않은 개별적 인물들의 테러활동이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정순만 등은 평안도 장사들을 모아 수차례에 걸쳐 을사오적 암살을 기도했고, 평양교인 최재학 이시영은 격문을 뿌리고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강화도에서는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들고 온 연희전문학교 출신 황도문과 대한제국 군인이었다. ‘갑곶전투’후 의병이 된 유봉진 권사는 ‘길상전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였다.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태동하게 된다. 이래서 상해는 우리 독립운동 투사들이 모여 들었다. 임시정부의 요인 외에도 이회영, 신채호, 여운형, 김창숙, 정인보 같은 지사 학자들도 모여들었다. 이때에는 3.1운동에 힘입어 독립운동 자금이 그전보다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몇 년이 못 되어 그 방향성을 가지고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임시정부에서 나온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적 독립운동을, 안창호는 하와이 등지에서 시민운동으로 독립심 고취를, 박용만은 미군 사관생도의 양성과 군사교육에 열중하였다.이때에 의열단이 만주 길림성에서 본부를 옮겨오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테러를 위해 국내에 침투하여 총독부와 경찰서 그리고 농민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가하면 일본으로 진출해 천황이 탄 수레에 폭탄을 던지는 등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이런 흐름에 맞게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대장 등 여러 명을 폭살시키므로 전과를 거두었다.한편 소련에서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았다가 러시아로 가서 독립자금을 끌여 들였고, 홍범도는 만주에서 다시 망명하여 러시아를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국내에서는 3.1운동과 6.10만세사건이 있은 후 일제의 탄압은 간혹했다. 이런 상황을 신채호 선생은 “강도 일본이 헌병 정치, 경찰 정치를 행하여 우리 민족은 조그만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가 일체 없어 고통과 울분,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 냉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눈뜬 소경이 되고 말았으며, 자식을 낳으면 일어를 국어라, 일본글을 국문이라 가르치는 노예 양성소(학교)로 보내고,…”라고 하며 ‘조선혁명선언’을 하게 된다.해외의 항일 독립운동1930년 신간회를 발족하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방향성이 달랐다. 또 분열로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신간회는 체포된 독립투사의 무료변론을 비롯하여 일제의 불법을 고발하고 농민, 노동자의 보호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모든 운동단체를 불법화하고 친일단체를 육성시켰다. 이런 탓에 조선 공산당이나 건국동맹과 같은 단체들은 지하운동으로 나갔다. 이러면서 중국쪽도 지지부진하였다. 간도나 북경, 상해도 독립군의 기지가 될 수 없었다. 일제는 용정의 우리 동포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주민을 모조리 죽이기도 하였고 첩자들을 풀어 독립투사들을 검거하였다. 그래서 임시정부도 중경 등지로 옮겨 갔으며 의열단도 남경 등지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우리의 항일 독립운동 투사들은 1940년 9월 17일 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우리 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광복군)를 조직하였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용대도 1941년에 여기에 통합되었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쌓으면서 2차대전 참전을 준비하였고, 중국 오지인 연안이나 태항산 지구에서 항쟁을 벌였다. 이렇게 끝까지 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겪은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수많은 민초들, 이름 없는 영웅들, 무명의 의병과 독립투사들고난받는 민초들과 함께 항일 독립투사들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나그네 신세가 되었고 온갖 학대와 수모, 굶는 일, 노상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지내야만 했다. 이뿐만 아니라 헤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추위에 떨어야만 했고, 체포되면 팔 다리가 부서지는 고문을 겪으면서도 ‘독립 조국’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회영과 신채호는 이렇게 대련의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김창숙은 다리가 부러져 앉은뱅이가 되었다.이렇게 ‘독립조국’의 꿈을 가진 민중들도 만세만 부른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빚더미에 쌓였을 적에 ‘국채보상운동‘으로 여성들은 금비녀를 뽑아 바쳤고, 상인들도 독립투사들이 군자금을 모으면 몰래 돈을 거두어 주었다. 여기에 지주도, 자본가도, 양반도, 양반도, 백정도 있었다. 독립투사들이 피신하면 목숨을 걸고 숨겨주는 일이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도리가 되었다. 만주와 상해의 동포들도 밭을 갈거나 노동을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원하였다.이렇게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세계대전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나라와 민족정신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원동력은 잃었을 것이다.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며 항일운동,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수많은 민초들, 이름 없는 영웅들, 무명의 의병과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을 되새기면서 민족의 정기를 회복하여 그 에너지를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이효상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칼럼 | 채수빈 | 2019-02-14 12:49

△김진홍 목사(동두천 두레교회)요즘 세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 있다. 촛불 혁명이란 말이다. 나는 그 말을 탐탁찮게 생각한다. 그 정권이 탄생한 과정을 과연 촛불 혁명이란 거창한 말로 표현할만한 내용을 갖추고 있을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분열과 다툼은 우리 겨레의 고질병 중의 하나이다. 어느 겨레보다 빼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음에도 여태껏 수난의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나온 것도 그런 망국적인 국민정신 탓이기도 하다.우리가 겪어야 할 참된 혁명이 따로 있다. 밑으로부터, 백성들로부터 밑에서 올라가야 할 혁명이다. 지금 경제 사정이 어려워 모두들 경제 경제 하고들 있어서 경제만 일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그릇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경제보다 먼저 해결되어져야 할 바가 있다. 경제의 바탕이 되어질 국민정신을 바르게 하는 일이다.과거를 돌이켜 보자. 1910년에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긴지 10년이 지난 후에 나라 안에서는 스스로 반성하는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우리가 어쩌다가 일본에 국권이 빼앗기게 되었을까 하는 반성이다. 그런 반성의 핵심인즉 우리 국민들의 정신 상태가 이웃 나라에 국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는 반성이었다.그 시대에 그런 반성을 쓴 글 중에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란 글이 있다. 1922년에 쓰인 이 글에서 춘원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 쓴다고 밝히고는 조선인들의 고질적인 병폐를 여덟 가지로 적었다.1) 거짓말하기2) 공리공론 일삼기3) 표리부동한 성격,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습관4) 전문성의 부족5) 낭비하는 습관6) 위생 관념의 부족7) 용기의 부족8) 결단력의 부족춘원 이광수 선생께서 적은 이들을 자세히 살피건대 지금도 그 병은 여전하지 않는가를 생각한다.

칼럼 | 채수빈 | 2019-02-13 18:55

△김고현 목사(한장총 총무)"싸워서는 절대 충분히 얻지 못하나, 양보하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얻는다"미국 데일 카네기 연구소를 설립하고, 작가로 널리 알려진 데일 카네기의 말이다.친구의 생일을 맞아 10만원 짜리 넥타이를 선물했다. 그런데 내 생일에 그 친구로부터 12,000원짜리 책 학권을 선물 받았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직장 동료가 퇴근을 못하고 고생하고 있어서 함께 남아 일을 도와줬다. 그런데 그 도와주었던 동료에게 오늘 간단한 부탁을 했는데 거절당했다. 분한 마음이 들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며칠 전 아내가 피곤하다고 하여 한 시간동안 안마를 해주었다. 오늘 내가 안마를 해달라고 하니 5분만 해주고는 바쁘다고 모른 척 한다. 괘씸한 생각은 물론, 정말 나를 사랑해서 결혼한 마누라인가 서운한 마음이 든다.취미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이 찾아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지난번에는 내가 대접했으니 이번에는 얻어먹어도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신발 끈을 묶으며, 시간을 끌어 어쩔 수 없이 지갑을 꺼내 계산을 했다. 얌체 같고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사람은 인간적(人間的 : 마음이나 됨됨이, 하는 행동이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맞는 것)인 사람이 좋다. 아무런 이해타산도 따지지 않고 자기가 먼저 양보하고 더 많이 베풀어 주는 사람이 좋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계산적인 존재이며, 이기적이다. 내가 준 만큼 받지 못하면 서운하고, 내가 준 것을 돌려받지 못하면 더 이상 주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투자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면 인간관계가 깨지게 된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손해만 보는 일방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이렇듯 타인에게는 인간적인 모습을 원하면서도 스스로는 계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사람이다.그러나 인간관계는 계산적인 관계가 차라리 바람직하다. 여기서 말하는 계산적인 관계는 이해득실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미치는 영향을 헤아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런 좋은 관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의미한다.사회에서 인간관계를 겪어 보고 느끼는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이 너무나 비계산적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헤아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편할 대로 행동한다. 당연히 인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목마른 자에게 삶은 달걀을 주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면박을 당하기 쉽다 그렇듯이 돕기 위해서 먼저 양보하고 상대를 잘 배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일에 있어 먼저 배려하고 베풀고 양보하는 사람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진다.

칼럼 | 채수빈 | 2019-01-30 15:24

△이효상 목사대책없는 한국교회‘한국교회, 대책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한국교회는 진정 1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전략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를 실천할 인재가 있기는 한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단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지속 가능한가? 한국교회는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과 레퍼토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전략적 이어야 한다. 교회가 더 이상 머뭇머뭇하기엔 시간이 없다. 한국교회 싱크탱크가 필요한 이유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을 지난 해 연말 발표했는데 발간 자료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문체부는 2015년 통계청 기준 내국인의 종교 인구가 43.9%(2,155만3,674명)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중 개신교가 374개 단체 967만5,761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는 불교가 482개 단체 761만9,332명, 천주교가 1개 단체 389만311명으로 뒤를 이었다. 자치단체별로는 경기도와 서울시가 단연 종교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서울시, 인천시, 광주시, 대전시, 세종시, 경기도, 강원도, 충남, 전북, 전남에서 개신교 인구가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불교는 부산시와 대구시, 울산시, 충북, 경북, 경남에서 가장 많았고, 천주교는 인천시에서만 2위에 올랐을 뿐 모두 3위권에 머물렀다.통계가 말해주는 제 종교의 약화1985년부터 한국의 종교 인구는 꾸준히 증가해왔으나 2015년에 이르러 다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1,720만명에서 1995년 2,259만명, 2005년 2,497만명으로 증가해왔으나 2015년에는 2,155만명으로 줄었다. 종교별로 살펴보면 개신교는 1985년 648만명, 1995년 876만명, 2005년 861만명, 2015년 967만명으로 한 때의 출렁임도 있었지만 다시 반등하여 꾸준히 증가세로 돌아선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1985년 805만명, 1995년 1,032만명, 2005년 1,072만명에서 2015년 761만명으로 크게 감소했고, 천주교도 1985년 186만명, 1995년 295만명, 2005년 514만명에서 2015년 389만명으로 떨어졌다. 이래서인지 각 종단마다 비상이 걸린 것 같다.어찌보면 한국사회는 오랜 시간 종교 간의 평화적 공존을 유지해 왔으며, 격한 이념적 갈등 속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법체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국가인권위가 미션스쿨의 신앙교육을 공격해온 종자연에 용역을 맡기고 지원하면서 종교간의 갈등을 유발시키고 기독교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종교편향의 행보를 해왔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개신교의 역할 가능성이미 개신교는 국민들 가운데 19.73%를 점유했고, 종교인구 내에서는 44.8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불교(15.53%/35.35%)와 천주교(7.93%/18.05%)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종교 규모 1위를 차지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견인하는 ‘주류종교’라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그러나 그 만큼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기울였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문체부의 발표에서 정작 문제는 종교인구 전체가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40~50대 중장년층에 비해, 어린 나이로 갈수록 점차 종교인구가 감소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개신교에서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한 ‘40~44세’ 구간 인구가 82만7,744명(불교 59만5,004명, 천주교 30만6,325)인데 반해, ‘5~9세’ 구간은 51만1,294명(불교15만7,285명, 천주교14만4,180명)에 불과했다. 이는 저출산 사회문제와 결부되어 있기도 하지만 갈수록 위기에 처하고 있는 다음세대의 감소에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며 이 현실은 앞으로도 언제든 반토막 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고령화를 대비하는 한국교회되어야교회가 고령화로 가고 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과 전략은 이제 필수가 아니라 전쟁과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포기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78.5%,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40%를 넘고, 그나마 있는 교회들도 겨우 유지하거나 몇 교회들이 모여 연합 교회학교를 운영해야만 할 정도로 인원이 줄어든 상태. 이런 교회학교를 위한 다음세대 사역은 도전적이고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여야 할 것 같다. 다시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자. 10년 아니 100년을 바라보면서.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칼럼 | 채수빈 | 2019-01-23 15:06

△김고현 목사(예장 보수 총무)어느 시골마을에 3대가 살고 있었다. 남편과 아내, 딸과 사위 그리고 딸의 자녀 그런데 딸이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치료비가 걱정되었다. 가장인 남편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시골에 내려와 동네에서 품을 팔아 근근히 살고 있었다.“여보 어떡해 오늘 수술 못하면 수미가 죽는데” / “어떻게 든 해봐”눈 한번 감았다 뜨니 빈 하늘만 남은 아내의 통곡어린 비수가 남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처참한 자신을 원망하며 병실 문을 나선 남자가 갈 수 있는데라고는 포장마차, 그저 아픔의 시간 안에서 혼자 외로이 견뎌내는 구슬픈 원망 앞에는 소주 한 병과 깍두기 한 접시가 놓여있었다. 슬픔과 자책의 마음으로 술을 마신 남자는 어둠이 깔린 거리를 헤맸다 담배 한 갑을 살려고 멈춰 선 곳은 불 꺼진 가게 앞, 불이 꺼진 가게지만 술김에 문손잡이를 당겼더니 문이 열린 것이다.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눈에 달빛에 비친 금고가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여보 어떻게든 해봐.. "아내의 부서진 말이 그 순간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금고문을 열고 정신없이 주머니에 닥치는 대로 주워 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는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신 것이었다. 남자는 주머니에 담았던 돈을 금고에 다시 옮겨놓고 있을 때, 말없이 다가선 할머니의 입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잔돈푼을 가져다가 어디에 쓸려고 무슨 딱한 사정이 있어 보이는데 그 이유나 한 번 들어봅시다.“할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남자에게 “말 안 해도 알겠네. 오죽 힘이 들었으면 힘내게!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일들이 생기는 게 인생 아니겠나?“ 할머니는 남자의 손에 준비한 듯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었다.“부족하겠지만 우선 이것으로 급한 불은 꺼질 걸세"가게 문을 나서 저만치 걸어가는 남자가 어둠 속에 서있는 할머니를 자꾸만 뒤돌아보면서 울먹이고 있을 때 “열심히 살아! 그러면 또 좋은 날 올 거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후 똑같은 겨울이 세 번 바뀐 어느 날! 할머니집 가게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라며 말하는 젊은 여자를 외면한 채 두리번거리든 남자가, “저어,, 여기 혹시 할머니” // “아 저의 어머니 찾으시는군요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물어물어 남자가 찾아온 곳은 할머니가 묻히신 묘지였다.“할머니께서 빌려주신 돈 잘 쓰고 며느리에게 돌려드렸습니다. 그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며 통탄의 눈물을 흘리던 남자의 눈에 묘비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사람은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사계절이 두번 오고 간 후 해맑은 하늘에, 사랑비가 간간히 뿌려지는 날 오후, 공원에 작은 푸드 트럭 한대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무료급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밥은 남편이, 국은 아내가, 반찬은 딸이.....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그런데 트럭 지붕 맨꼭대기에 깃발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깃발에는 “사람은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렇다. 이웃과 나눔은 바로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다.

칼럼 | 채수빈 | 2019-01-16 21:06

△이효상 목사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1919년 3월 1일을 전후로, 시기는 그해 5월말까지 또는 그 이듬해 3월말까지 전국방방곡곡에서는 물론 해외에 이주해 있던 동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던 운동이다.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1,500여회를 넘었고, 참여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천 800만 정도였으니 총 인구의 10%가 넘는 참여는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 근대화를 여는 시민혁명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3·1운동은 한국교회의 적극적 참여로 이루어 졌다. 당시 총인구의 1.5%에 불과하였던 기독교인은 총 피검자의 17.6 나 차지하였던 것을 보아도 얼마나 적극성을 띠었는지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 운동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가 되었으며, 지도력과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되어 기여했다.3·1운동은 한국교회가 현실참여를 위한 결단을 내린 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교회가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세워 기독교인들의 현실참여를 철저히 막은데 반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신앙적 결단에 의해 참여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정치적 기능을 제거하려 노력하였지만 교회는 저항과 투쟁이라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였다.3·1운동은 이런 기독교적 ‘애국’, ‘애민’의 기초에 기인(起因)하였다. 한국교회는 만세운동 이전에도 독립운동의 싹은 트고 있었던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 독립선언을 후원하였고, 3·1독립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이 고백한대로 3·1독립선언의 기초이념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바가 컸다.3·1운동은 한국교회가 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3·1운동 전개과정에서 보면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의식있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조직화되어 만세 시위를 벌인 경우도 적지않게 발견된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모든 흐름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확산과정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다.교회와 학교, 기독청년, 여전도회와 선교회 등 기독교 조직이 운동의 연락책과 동원책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3·1운동은 그처럼 신속하게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오래 지속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919년 배포된 독립선언서.3·1운동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지불한 댓가는 참으로 컸다. 교회는 평신도들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들까지도 적극 참여하고 주동하였으므로 일제의 주목을 받아 그 핍박과 피해도 매우 많았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시위에 헌병,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무차별 진압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체포, 구금, 고문하였다. 이러한 탄압과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그 대표적 사례가 1919년 4월 15일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방화사건이다,3·1운동 참여로 인해 한국교회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장로교는 체포된 자:3,804명(목사:134명, 관계지도자:202명, 남신자:2,125명, 여신자:531명, 매맞고 방면된자:2,162명, 사살된 자:41명, 수감자 1,642명, 매맞고 죽은 자:6명)과 파괴된 교회 12개 등이다. 그런가하면 감리교는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교사의 합수가 160명이었다. 총 피검자 19,525명중 기독교인이 3,426명으로 17.6%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직업적 종교인, 즉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와 불교의 두배에 이른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 471명이었는데 그중 기독교인이 309명으로 65.5%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구한말부터 여성 인권과 지위향상, 계몽에 힘썼던 기독교의 영향이 3·1운동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기독교가 이근 3·1운동에서 역할 못지않게 피해도 컸다. 이러한 피해는 교세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장로교는 교회수가 1,705개소, 신자가 144,062명이었으며, 감리교는 교회가472개소, 신자가 35,482명으로 이 두 교파의 합수가 교회 2,177개소, 신자가 179,544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세는 3·1운동의 피해로 인해 전년도인 1918년에 비해 교회수 88개소, 신자수 22,409명이나 줄어들었다. 여기서 그동안 교인의 자연증가 추세까지 고려해 볼 때 교회는 3·1운동참여로 엄청난 피해와 희생을 감수한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항일민족저항운동의 한 방편이자 ‘민족교회’로 인식되었다.3·1운동 당시와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당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그 의무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민족화합을 이루는 일에 적극적이었다.우리 민족의 공공성에 대한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하였다. 그렇게 하며 복음과 정의를 위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로 변질되어 분열된 모습을 극복하고, 어떤 이유로도 하나된 모습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하겠다.3·1운동의 바람을 다시 불어오게 한국교회가 나서야 한다. 아니, 3·1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취시키고 계승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3·1운동의 정신은 단순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갈망하던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지킨 정신이다.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먼저 3·1운동의 정신을 다시 새롭게 되살려내 교회가 이 민족을 향해 어떤 희생을 치루며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하여 왔는지 정확한 메시지로 사회에 전달해야 한다. 그런 모습을 재현 하므로 다시 민족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히 일어섰던 신앙의 선배들,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특히 기독인들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연합기관, 그리고 각 교단이 하나된 모습으로 100주년대회를 치뤄 8천만을 섬기며 통일시대를 열고 다시 도약하는 기념비적 사건이 되기를 기대한다. 거룩한 교회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다짐하는 원년이 돼야 한다.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칼럼 | 채수빈 | 2019-01-14 17:13

△김진홍 목사(동두천 두레교회)1월 1일 9시에 새해 첫날이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TV KBS를 틀었더니 느닷없이 김정은 신년사가 방영되고 있어 몹시 놀랐다. 그리고 화가 났다. 1월 1일 황금 시간대에 우리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가 나와야지 왜 김정은의 신년사가 나온단 말인가? 어차피 녹화된 것일 텐데 두었다가 2일이나 다른 시간대에 방영하였어야지 그날 그 시간에 방송한다는 것이 상식에 안 맞는 일이다.우리가 지금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 시간에 그 프로를 내보낼까? 그것도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KBS가 아닌가? 다음 날 2일에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 방송이 나오긴 하였는데 전날의 김정은 방송에 비하면 부록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라를 운영하는 데에 기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기본을 무시한 채 1월 1일 9시 황금 시간에 김정은 신년사를 방송한다는 것은 국민을 졸로 보는 행위가 아니겠는가?김정은 방송을 듣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1월 1일에는 우리 손으로 뽑은 우리 대통령의 신년사를 듣고 그 다음 날 김정은의 말을 들어도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두 분의 방송 원고를 일부러 구해서 찬찬히 정독하였다. 김정은은 한결같이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자는 이야기였고 사회주의 동맹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동맹 국가인가? 그리고 김정은은 개성단지 기업인들이 고생하고 있으니 받아 주겠단 것이었고 금강산을 남조선 동포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니 열어 주겠다는 식의 발언이었다. 왜 자기들의 돈이 아쉬우니 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가? 개성공단 열기나 금강산 관광 개발이 김정은이 우리를 봐줘서 개방하겠다는 것인가?그런데 김정은의 신년사에 대하여 우리 정부의 통일부 장관,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셋이서 훌륭한 내용이라고 칭찬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방송이 이어졌다. 그들 3분은 북한으로 가서 장관직을 맡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까? 그렇게 존경하는 김정은 정권으로 가서 장관을 맡으면 좋을 성싶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남북한 양쪽에 다 좋을 것 같다.

칼럼 | 크리스천월드 | 2019-01-08 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