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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목사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1919년 3월 1일을 전후로, 시기는 그해 5월말까지 또는 그 이듬해 3월말까지 전국방방곡곡에서는 물론 해외에 이주해 있던 동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던 운동이다.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1,500여회를 넘었고, 참여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천 800만 정도였으니 총 인구의 10%가 넘는 참여는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 근대화를 여는 시민혁명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3·1운동은 한국교회의 적극적 참여로 이루어 졌다. 당시 총인구의 1.5%에 불과하였던 기독교인은 총 피검자의 17.6 나 차지하였던 것을 보아도 얼마나 적극성을 띠었는지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 운동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가 되었으며, 지도력과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되어 기여했다.3·1운동은 한국교회가 현실참여를 위한 결단을 내린 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교회가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세워 기독교인들의 현실참여를 철저히 막은데 반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신앙적 결단에 의해 참여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정치적 기능을 제거하려 노력하였지만 교회는 저항과 투쟁이라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였다.3·1운동은 이런 기독교적 ‘애국’, ‘애민’의 기초에 기인(起因)하였다. 한국교회는 만세운동 이전에도 독립운동의 싹은 트고 있었던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 독립선언을 후원하였고, 3·1독립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이 고백한대로 3·1독립선언의 기초이념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바가 컸다.3·1운동은 한국교회가 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3·1운동 전개과정에서 보면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의식있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조직화되어 만세 시위를 벌인 경우도 적지않게 발견된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모든 흐름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확산과정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다.교회와 학교, 기독청년, 여전도회와 선교회 등 기독교 조직이 운동의 연락책과 동원책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3·1운동은 그처럼 신속하게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오래 지속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919년 배포된 독립선언서.3·1운동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지불한 댓가는 참으로 컸다. 교회는 평신도들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들까지도 적극 참여하고 주동하였으므로 일제의 주목을 받아 그 핍박과 피해도 매우 많았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시위에 헌병,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무차별 진압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체포, 구금, 고문하였다. 이러한 탄압과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그 대표적 사례가 1919년 4월 15일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방화사건이다,3·1운동 참여로 인해 한국교회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장로교는 체포된 자:3,804명(목사:134명, 관계지도자:202명, 남신자:2,125명, 여신자:531명, 매맞고 방면된자:2,162명, 사살된 자:41명, 수감자 1,642명, 매맞고 죽은 자:6명)과 파괴된 교회 12개 등이다. 그런가하면 감리교는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교사의 합수가 160명이었다. 총 피검자 19,525명중 기독교인이 3,426명으로 17.6%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직업적 종교인, 즉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와 불교의 두배에 이른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 471명이었는데 그중 기독교인이 309명으로 65.5%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구한말부터 여성 인권과 지위향상, 계몽에 힘썼던 기독교의 영향이 3·1운동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기독교가 이근 3·1운동에서 역할 못지않게 피해도 컸다. 이러한 피해는 교세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장로교는 교회수가 1,705개소, 신자가 144,062명이었으며, 감리교는 교회가472개소, 신자가 35,482명으로 이 두 교파의 합수가 교회 2,177개소, 신자가 179,544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세는 3·1운동의 피해로 인해 전년도인 1918년에 비해 교회수 88개소, 신자수 22,409명이나 줄어들었다. 여기서 그동안 교인의 자연증가 추세까지 고려해 볼 때 교회는 3·1운동참여로 엄청난 피해와 희생을 감수한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항일민족저항운동의 한 방편이자 ‘민족교회’로 인식되었다.3·1운동 당시와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당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그 의무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민족화합을 이루는 일에 적극적이었다.우리 민족의 공공성에 대한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하였다. 그렇게 하며 복음과 정의를 위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로 변질되어 분열된 모습을 극복하고, 어떤 이유로도 하나된 모습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하겠다.3·1운동의 바람을 다시 불어오게 한국교회가 나서야 한다. 아니, 3·1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취시키고 계승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3·1운동의 정신은 단순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갈망하던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지킨 정신이다.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먼저 3·1운동의 정신을 다시 새롭게 되살려내 교회가 이 민족을 향해 어떤 희생을 치루며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하여 왔는지 정확한 메시지로 사회에 전달해야 한다. 그런 모습을 재현 하므로 다시 민족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히 일어섰던 신앙의 선배들,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특히 기독인들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연합기관, 그리고 각 교단이 하나된 모습으로 100주년대회를 치뤄 8천만을 섬기며 통일시대를 열고 다시 도약하는 기념비적 사건이 되기를 기대한다. 거룩한 교회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다짐하는 원년이 돼야 한다.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칼럼 | 채수빈 | 2019-01-14 17:13

△김진홍 목사(동두천 두레교회)1월 1일 9시에 새해 첫날이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TV KBS를 틀었더니 느닷없이 김정은 신년사가 방영되고 있어 몹시 놀랐다. 그리고 화가 났다. 1월 1일 황금 시간대에 우리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가 나와야지 왜 김정은의 신년사가 나온단 말인가? 어차피 녹화된 것일 텐데 두었다가 2일이나 다른 시간대에 방영하였어야지 그날 그 시간에 방송한다는 것이 상식에 안 맞는 일이다.우리가 지금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 시간에 그 프로를 내보낼까? 그것도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KBS가 아닌가? 다음 날 2일에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 방송이 나오긴 하였는데 전날의 김정은 방송에 비하면 부록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라를 운영하는 데에 기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기본을 무시한 채 1월 1일 9시 황금 시간에 김정은 신년사를 방송한다는 것은 국민을 졸로 보는 행위가 아니겠는가?김정은 방송을 듣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1월 1일에는 우리 손으로 뽑은 우리 대통령의 신년사를 듣고 그 다음 날 김정은의 말을 들어도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두 분의 방송 원고를 일부러 구해서 찬찬히 정독하였다. 김정은은 한결같이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자는 이야기였고 사회주의 동맹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동맹 국가인가? 그리고 김정은은 개성단지 기업인들이 고생하고 있으니 받아 주겠단 것이었고 금강산을 남조선 동포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니 열어 주겠다는 식의 발언이었다. 왜 자기들의 돈이 아쉬우니 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가? 개성공단 열기나 금강산 관광 개발이 김정은이 우리를 봐줘서 개방하겠다는 것인가?그런데 김정은의 신년사에 대하여 우리 정부의 통일부 장관,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셋이서 훌륭한 내용이라고 칭찬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방송이 이어졌다. 그들 3분은 북한으로 가서 장관직을 맡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까? 그렇게 존경하는 김정은 정권으로 가서 장관을 맡으면 좋을 성싶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남북한 양쪽에 다 좋을 것 같다.

칼럼 | 크리스천월드 | 2019-01-08 11:01

△김고현 목사(예장 보수 총무)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자고 일어나면,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저녁에는 하루를 무사히 보내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에 대해서 매우 인색하다. 감사를 잊고 산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늘 깨어서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라고 했다. 감사하는 마음을 늘 생활화해야 하는 이유이다.옛날 독일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해인가 독일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그때 어떤 돈 많은 노인 부부가 날마다 빵을 만들어서 동네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매번 빵을 한 개씩만 가지고 가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은 서로 조금이라도 더 커 보이는 빵을 차지하겠다고 난리를 떨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한 여자 아이 만큼은 예외였다.언제나 맨 끝에 섰다. 자연히 그 아이에게 돌아가는 빵은 항상 제일 작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더 큰 빵을 차지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에게 빵을 나누어 준 노인 부부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 아이는 제일 작은 빵을 차지하면서도 언제나 깍듯하게 노인 부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에 대해서 매우 인색하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그 여자아이에게 돌아온 빵은 유난히 더 작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아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인 부부에게 “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여자 아이는 집에 와서 빵을 먹으려고 하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빵 속에 1온즈 금화 한 닢(한화 130만원 가치)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의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이것은 너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마련한 선물이란다."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타인을 도울 수 있는 한 가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찾아서 개발하고 활용하면 나와 타인이 모두 행복해진다. 이것이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교훈이며, 교육이다. 감사의 에너지는 어려운 문제를 싑게 해결해 준다. 또한 감사의 마음은 우리를 건강하고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도 감사의 메세지는 강력하다. 우리 삶의 희망이기도 하다.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하나님의 백성들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생활화해야 한다. 성서의 경제관은 한마디로 나눔과 섬김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다. 독일 노부부의 빵에 대한 이야기도, 나눔과 섬김의 표현이며, 자신에게 준 부를 이웃과 함께 공유하며, 감사하는 마음에서 행동으로 옮긴 사랑의 실천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많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칼럼 | 채수빈 | 2018-12-12 18:03

△김진홍 목사(동두천 두레교회) 멕시코 남부에서 과테말라에 이르는 유카탄 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인디언들이 이루었던 문명을 마야 문명이라 부른다. 3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찬란하였던 문명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역사가들은 그 원인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마야 문명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나 내부의 분열의 흔적도 없이 그냥 사라졌다.역사학자들은 마야 문명이 소멸된 원인을 제구실을 못한 지도자들에게서 찾는다. 국가 지도자들이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에 대하여 마야 문명이 일러 준다. 마야 문명은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과도하게 수탈하고 억압하고 신뢰를 주지 못하게 되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밀림 속으로 사라지자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어느 시대에나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 혹은 지도층이 필요하다. 그런 지도자나 지도층이 부재할 때에 그 국가나 공동체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지금 한국의 사정이 어떠한가? 백성들이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 혹은 지도층의 부재로 백성들의 수심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지난날에는 어려웠어도 백성들이 믿고 의지하고 희망을 걸 수 있는 지도자들이 있었다.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에도 우리 백성들에게는 조만식, 이승만, 김구, 안창호 같은 어른들이 계셨기에 백성들은 힘든 시기를 희망을 지니고 견딜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겨레를 바르게 이끌어 나갈 어른들이 없는 점으로 백성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유대인들은 훌륭한 분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긴다. 자녀들이 그런 분들로부터 감화를 받게 하기 위하여서이다. 자녀들에게 살아 있는 모범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인물들을 본받고져 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도 자라는 자녀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지도자들을 기르고, 높이고, 존중하자.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칼럼 | 크리스천월드 | 2018-11-21 15:51

△김윤창 목사(인조에선교회) 오직 그리스도를 섬기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친절하게 대하려고 하지 말라.그렇다고 일부러 냉대하거나무관심할 필요는 없다.그들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그를 가까이서 조금만 자세히 본다면 말이다.우리는 우리 자신도 사랑할 수 없다.우리 생각의 근원을 살펴본질을 파악하게 된다면 말이다.그래도 사랑하게 되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다. 사람은 죄인이다.그리고 그 생명은 호흡에 달려있다.산 자라고 믿기엔 너무 약하다. 인생을 의지하거나 기대하는 것은곧 사라질 안개에기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에서 내려두라.우리 자신을 포함하여사람들을 움직일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우린 그저 살아질 뿐이다. 쓸모없는 미움이나 분노에사로잡히지 말라.죄인을 기대하는 것은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을 기대한다면 곧 실망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 말을 지킨다는보장이 없으며,약속도 곧 까먹는다.그런 사람을 기대하지 말라.그는 탐욕에 따라 언제든 좌우되는 존재임을 잊지 말라. 좋은 의도를 가지고살려는 것그 점만 가상히 여기고그를 기대하지 말라. 오늘 사랑했던 그가내일 원수가 될 수 있다.절대적으로 나쁜 사람도 없고절대적으로 좋은 사람도 없다.사람은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원하지만결코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생각과 행동이 다르며마음은 더 더욱 믿을 수 없다. 사람을 기대했다가 큰 실망을 안고 마음의 상처로여기는 사람이 있다면그것은 사람을 기대했던결과일 것이다.인생은 그저 살아질 뿐이다. 인생이 세상에 온 목적은창조자를 알고 그와 하나가 되기 위함인데그리스도가 그 일을 이루신다.그를 통해하나님과 하나가 되면비로소 얻을 것을 얻고이룰 것을 이루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창조물을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그저 부족함이 없음에감사하며 사는 것이 본분이다.그러나 인생에는 그 이상이 있다.창조자와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그의 말씀을 들으라.인생의 목적을 이룰유일한 길이다. 보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무형의 교회가 아니면교회일 수 없다.교회란, 보이지 않는 성령과그를 의지하며 따르는 자들이기때문이다.  유형의 교회 안에서성령을 따른다는 자들을 주의하라.성령은 유형의 교회에서역사할 수 없다.성령같은 악령이 있다.유형의 교회에서는 성령을 부를 때악령이 역사함을 잊지 말라.교회가 아닌 까닭이다.파격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사랑과 용서, 행복을 말하고 권면하는 자들을 멀리하라.죄인에게서 사랑과 용서가나온다고 믿는다면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이며아무 것도 알지 못한 자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너무 사랑스럽고너무 은혜스러우며너무 믿음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그는 광명의 천사이다.당황스럽겠지만 사실이다.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서 선이 나올 수 있겠는가생각해보라.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만일 어떤 사람을 달리 대한다면당신은 이미 진리를 떠나 있는 것이다.누군가를 높인다면죄인을 높이는 것이며,누군가를 존경하다는 것은당신이 육신가운데 있음을 알라. 아무도 믿거나 의지하지 말라.바람앞의 갈대를 신뢰하는 것은어리석은 일이다.감사할 수 있을 때 감사하고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거기까지만 행하고믿거나 신뢰하지 말라.좋은 사람이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좋은 사람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고그를 섬기라.특히 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자기 십자가를 지고자기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그를 전부 삼으라.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비밀이란당신에게 열리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말하는 자가 있다면그의 말은 듣고그는 섬기지 말라.사람에겐 마땅한 도리를 행하는 것으로 족하다.당신이 섬길 자는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다.그래서  끝내 구원에 이르라.

칼럼 | 채수빈 | 2018-11-13 19:24

△김고현 목사(예장 보수 총무)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케네디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로비를 걷다가 콧노래를 부르며, 너무 즐겁게 바닥을 닦고 있는 한 청소부를 발견했다. 대통렁은 그 모습이 신기해서 그 청소부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니, 청소하는 일이 그렇게도 즐겁습니까?"그러자 청소부가 대통령에게 힘찬 어조로 대답했다."대통령님, 저는 평범한 청소부가 아닙니다. 인류를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하면서 자부심에 가득찬 대답을 하였다.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이다. 혼자 있는 고독의 시간도 즐기고, 실패와 스트레스를 즐기며,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 일을 그저 즐기는 사람, 이들을 쓰러트릴 수 있는 이는 세상 누구도 없다. 이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며, 자긍심과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다.그렇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루 일과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즐겁게 보내야 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하여 세상을 더 사랑하는 주님의 백성들을 전도하는 일로 즐거움과 자부심으로 삼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항상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그것은 사람 모두가 욕심과 욕망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직업에 대해서 만족하며, 자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 교회를 보라. 목사는 일생동안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 없다. 문제는 그 욕심이 과하다는 것이다. 어느 목사는 욕심이 너무 과한 나머지 교회당을 건축한지 얼마 안되어 지금의 교회당을 뜯어내고, 더 호화롭고, 맘몬교회당을 건축한다.그것은 교인들이 교회의 사이즈로 목회자를 평가하기 때문이 아닌가. 또한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며, 하나님 자리에 맘몬으로 대치시킨 결과이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자부심보다도 교회의 사이즈로 자부심을 느낀다. 때문에 일부 목회자들은 작은교회를 시무하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기보다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위기 소침해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현주소이다.마키야 밸리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항상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틀린 말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겠는가. 때문에 목회자들은 항상 하나님나라의 전위대라는 자긍심을 가져야 됨에도 그렇지 못하다.한국교회사 학자인 백낙준 교수는 “한국교회의 참교회는 농촌교회이며, 참 목회자는 이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이고, 참교인은 이 교회의 교인들이”고 했다. 목회자들은 이 말을 되새기며, 비록 교회는 작지만 참목회자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 하나님나라의 전위대로서 맡은바 사명에 충실하자.

칼럼 | 채수빈 | 2018-11-06 21:21

△'인조에선교회' 김윤창 목사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사람은 배우지 않아도 그 생각이 같거나 비슷합니다. 세상에서 난 자는 세상에 속한 생각을 합니다.그 깊이에 있어서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대동소이합니다.  사람이 궁리하거나 경험한삶의 원리나 잘 사는 법, 신념 등을철학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하거나 성실하면잘 살게 된다는 일반적인 법칙은대개는 맞습니다만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런 잘 못 없이피해를 입기도 하고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단란했던 한 가족이한 순간에 붕괴되기도 합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고나아무 관계도 없는 자의 오해나일시적인 분노에 의해불행을 맞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없이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잘 살게 되거나 성공할 것이라는 것은아무런 사고나 다른 사람의 방해나위협, 시기나 질투 등이 없을 경우엔가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삶의 원리를 붙들고 사는 것이 바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내일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살아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평생 자신이 주장했던 이론에 물음표를 남기게 되는 것은아무리 바른 이론이라도꼭 그렇게 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사람에게서 난 말은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어떤 선생이나 철학자의 주장이나또는 설교자의 말에 자신의 생각과 아무런 충돌 없이옳게 여긴다면당신은 세상에 속한 자이며받아들인 이론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의 힘'이라는말을 듣고 그에 따른 도전을 받고 자기를 이기며 사랑하며 산다고가정해 봅시다.바울은 그것을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혹은 사람의 유전이나 초등학문이라고말한 것입니다. 곧 세상에 속한 것이란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근본적인 사고 변화가 없는 사람은아직 그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리스도를 믿는 것은사고방식에 있어서의 혁신을 의미합니다.타고난 사고방식대로사는 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이며아직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의 빛을본다는 것은현재까지 살아 온 자신의 삶의 기반이완전히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교회에 출석하며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예배를 드리며 기뻐하며 즐거이신앙생활에 임했던 사람이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옳다 여겼던 모든 것을 내어 던지는 것은생명의 빛을 본 사람만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의 빛을 보았다는 것은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붕괴되는 결과를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고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기대었던 모든 것,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그의 말씀에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의 삶을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는 당신이 옳다고 여기는어떤 말씀이나 이론이 아닙니다.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이 그를 믿고 있다고 해서진리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믿고 생명의 빛 안에서 산다는 것은당신이 지금껏 옳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버릴 뿐만 아니라,자신의 주장이나 예측, 확신이나 신념까지 모두 버리고오직 그만을 전부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속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오직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대로행하며 그 안에 사는 것이진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세상적 가치와 자신의 모든 사고방식을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의 안에서만희망을 보고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곧 자기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런 사람만이 생명의 빛을 보고 따르는 자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면당신은 조용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자기 주장이나 확신, 신념 등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삶은 오직 그에 의해사는 것입니다.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기 것을보유하고 잃지 않은 사람은아직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빛을 보았다면어둠을 벗었을 것이며오직 그에게 자신을 드리며그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곧 자기 소유을 잃은 사람이며그만이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입니다. 

칼럼 | 채수빈 | 2018-10-20 15:34

△동두천두레교회 김진홍 목사교회의 사역 중에는 여러 분야가 있다. 도시 선교, 농촌 선교, 해외 선교, 청소년 선교 등이다. 그런 분야 중에 예언 사역이란 분야도 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영감으로 미래를 예측하여 전하는 사역이다. 미국의 예언 사역자 중에 캣 커라는 여자가 있다. 얼마 전에 한국도 다녀간 듯하다. 그녀가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예언한 내용이 있다.성경 말씀이 아니기에 꼭 믿을 내용은 아니다. 그냥 참고하여야 할 따름일 것이다. 그 내용을 4가지로 나눌 수 있다.1) 하나님은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21세기 이후 소중히 쓰시려 하신다.2) 멀지 않은 장래에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3) 통일한국이 된 이후에는 공산주의 공산당은 한반도에서 사라질 것이다.4) 지금 남북 회담이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앞에서 적었듯이 캣 커 여사의 예언을 그대로 믿을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성경 말씀이지 사람들의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예언은 믿고 싶어지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지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싶어지는 내용이다.따지고 보면 우리 겨레는 억울한 겨레이다. 일본에 강점되었다가 해방이 되는가 하였더니 엉뚱하게 분단이 된 이후로 70년 세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그러나 다행스런 것은 나라 안팎의 흐름이 통일한국 시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굳이 미국의 예언 사역자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들이 피부로, 온몸으로 통일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통일이 중요할수록 어떤 통일이냐가 더 중요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 아래 자유 민주 통일이 아닌 통일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그런 통일이 아니라면 목숨 걸고 투쟁하여 물리쳐야 할 것이다. 70년이 지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로 고통당하고 있음에는 분명히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 통일한국이 세계사에 감당하여야 할 큰 몫이 있기에 그 뜻을 찾아 능히 감당할 능력과 비전을 주시려는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칼럼 | 크리스천월드 | 2018-10-04 18:35

△김윤창 목사(인조에선교회)시원한 바람의 가치는힘들게 땀흘려 본사람만이 알 수 있다. 구원의 은혜는 그것을 얻도록자기를 버려가며 자기 죽음에이른 자만이 그 진가를 알게 된다. 이는 스스로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그럴 상황이 오면버리는 편을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진리에 합당한 삶의 과정이 없이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는 없다.구원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 구원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므로그보다 더한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그로써 충족되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가 그 위에 어떤 은혜를구한다는 것은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이미 받았기 때문이며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은혜를 구하는 것은그것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누릴 수도 없는 것이다. 구원 받은 적이 없다면 구하라.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 외에다른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만일 구원없는 자가형통이나 평안을 구했다면그는 구원이 아닌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자신과 세상을 벗어나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가는 것이므로세상의 복과 형통을 구할 수 없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구원을 확신하면서 형통과 복을 구한다.그럴 수는 없다. 구원없는 자의 특징이다. 구원받은 사람, 즉 해방된 사람은자기에게 매이지 않으며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뜻을 구한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은자기 뜻을 살피거나 주장하지 않으며자기 생각에 빠져있을 수 없다. 그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육신과 상관된 일을 행할 수 있지만자기 뜻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는다. 나그네와 같이 세상에서 초월된 삶을 살며마음 중심으로부터 늘 주를 바라며그 안에서 행하고자 한다. 다 가진 자는 더 구하지 않는다.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피지 않고그에게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 구원받은 자는 아버지를 소유한 것으로충족하고 자기를 위해 더 구하거나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다.세상은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단지 그의 백성을 찾아 구원케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이었다.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만일 아니라면구원을 향해 살아야 할 것이며온 삶의 목적이 구원이어야 한다. 무얼 행해도 그리스도를 구하는 마음이앞장서 있어야 하며그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구원을 바라는 자는 세상에 살지만세상을 누릴 생각은 갖지 못한다.꼭 이룰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선 과부처럼,오랜 혈루병을 앓아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을 갖는다. 그러니 남들이 관심하는 것에마음을 두지 않으며 불필요하고중요치 않은 일에 마음을 쏟지 말라. 그의 온 관심은 구원에 있기 때문이며그것을 얻기까지는 사실상마음의 쉼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로 전부가 되게 하고무얼 행해도그를 구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잃지 말라. 세상 사람들의 일로 마음쓰지 말라.그들에게 정의나 공의를 기대하는 것은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행하는 거짓이나 속임에너무 분노하지 말라.자신만 해할 뿐이다. 굳이 관여치 않아도 되는 일에마음을 쏟지 말고없어도 되는 일에 시간을 낭비치 말라. 성령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라.그를 소유코자 하는 소망을 놓지 말라.그것이 유일한 기도일 것이다.

칼럼 | 채수빈 | 2018-09-06 15:32

△두레수도원 김진홍 목사"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니라." (마태복음 25장 21절)수녀 마더 테레사가 말했다."작은 일들에 충실하십시오. 당신을 키우는 힘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왜 그럴까?왜 사람들은 성공을 바라면서 실패로 인생살이를 끝내는 것일까?자신의 삶이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다음의 3가지를 갖추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지를 못한 채로 그냥 성공만을 바라고 살아가기 때문이다.첫째는 작은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둘째는 바닥 곧 기초를 중요시하고 기초를 확실히 다져 나가야 한다.잘 되어가는 듯하다가도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여 중도에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약점이 모든 분야에 기초가 다져 있지를 못한 탓이다.바닥을 중요시하고 바닥에 두 발을 딛고 튼튼히 선 사람이 그 바닥 위에서부터 성공이라는 미래를 쌓아가게 된다.셋째는 내면을 먼저 충실히 한 후에 외면으로 나아가야 한다.안에서 밖으로가 성공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을 다지기 전에 겉치장부터 하려 든다.이를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 한다. 우리 사회의 적폐 중의 적폐가 바로 이 점이라 여겨진다.

칼럼 | 크리스천월드 | 2018-08-28 15:05

한 남자가 결혼했다. 그는 신혼여행이 끝나자 곧 사라졌다. 그리고 몇 달 후 나타났다. 화를 내는 신부에게 그가 말했다. “왜 화를 내는 거요. 우리는 분명히 결혼했고 사랑하는 사이잖소. 생활비도 보냈는데 무엇이 불만이오”한 어린이가 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가정 방문한 교사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걸요” 이렇듯 형식과 규칙을 무시하면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세상이 점점 질서를 잃어가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질서 찾기”다.영국의 저술가며 사회개혁가인 새뮤얼 스마일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서는 시간의 가장 훌륭한 지배자이다. 왜냐하면 일이 효과적으로 처리되지 않는 한 시간은 그대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한 번 잃어버리면 영원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질서는 많은 중요한 문제들과 결부된다. 도덕이나 물질에 따른 법칙에 대한 복종도 질서다. 세상은 질서로 시작했다. 질서가 있기 전에는 혼돈이 지배했다.”그동안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 담임 청빙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은 교회세습이라는 문제를 교계에 던졌고, 수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결국 지난 8월 7일 총회재판국은 ‘세습유효’ 결정을 내림에 따라 명성교회 세습이라는 성벽을 만들어줬다.통합 재판국장은 판결 직후 기자들에게 “공정성 있고 양심과 법과 원칙에 의해 진행했다. 국원들 전체가 이러한 결과에 모두 승복하고 기도하면서 마쳤다”고 말했다.통합 재판국이 말하는 ‘법’은 무엇이고, ‘양심’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법은 인류공동생활에서 사회를 유지하고 통제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흔히 말하듯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사람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 중에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안녕과 평화를 파괴하는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을 제재할 필요가 있게 된다.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법이 있다는 말이다.종교도 사회와 같다. 교단 내 많은 신도가 늘어남에 따라서 질서를 위해 교단 헌법이 만들어졌다.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교단 헌법을 가지고, 통합총회 재판국은 질서를 바로 잡았어야 옳았다.교단 내 질서 바로잡기를 소망하는 이들에게 통합 재판국은 지난 3월 13일 서울동남노회 임원선거가 무효라고 판결해 일차적으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따라서 무효화된 임원 선거와 함께 이들이 결의한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도 무효화 되는 것이 당연한 결과요 질서였다. 그러나 통합 재판국은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에 대해 ‘세습유효’ 결정을 내렸고, 자신들이 판결한 일차적 질서를 무시했다. 이는 ‘법’을 무시한 처사이며, 질서를 바로잡으라고 만든 재판국이 도리어 질서를 어지럽힌 결과를 가져왔다.이 같은 통합 재판국의 결과에 교회사학자인 옥성득 교수(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는 자신이 속한 노회에 ‘목사직 사직서’를 제출했다.옥 목사는 사직서에서 “오늘 재판국이 8:7로 명성교회 세습을 인정했다”면서 “저는 이 판결이 부당하므로 항의하며, 다음 총회헌법에 따라 예장 통합 측 목사직을 ‘자의 사직’하겠다”고 밝혔다.더불어 “세습 인정 판결로 장로교회는 80년 전 신사참배 결의보다 더 큰 죄를 범했다”면서 “ 당시는 일제의 강제로 결의했으나, 오늘 재판국은 자의로 결정했기에 통합 교단은 오늘자로 죽었다”고 천명했다.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법’을 바로 세우라고 있는 재판국이 부당한 판결을 내렸고, 질서를 바로잡지 못하는 교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옥성득 교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만하다.이뿐 아니라 기독법률가회는 지난13일 성명을 발표하고, 예장통합 총회 재판국이 내린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 유효 판결에 대해 “무효화된 임원 선거에서 선출된 서울동남노회 임원들이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를 처리했고, 사실상 파행된 노회 절차를 무리하게 진행해 처리했으므로 절차적으로 무효”라고 밝혔다.또한 “이 판결은 같은 재판국이 이미 내린 노회장 선거 무효 판결과 완전히 모순된다”면서 “변론 과정에서 세습금지 조항이 교인의 기본권으로 침해한다고 주장한 명성교회 견해는 법리를 떠나 건전한 상식인의 눈으로 봐도 기이하다”고 비판했다.통합총회 재판국은 교단이 세운 헌법상 세습 금지 조항에 위배되는 판결을 내렸고, 절차와 내용 면에서 이번 총회 재판국 판결의 합법성을 놓고 논란이 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한국의 헌법재판소에서는 "양심이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했다.보통 '양심없는 놈'이나 '양심이 찔린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의 공통점 중 하나가 양심의 존재다. 대중들이 사용하는 단어 중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는 양심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양심이 없다면 수치심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통합 재판국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인지 묻고 싶다.옷을 입는 것에도 순서 곧 질서가 있다. 안에다 입어야 할 옷을 겉에다 입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은 분명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보편적 입장이다.통합 재판국은 ‘양심’적으로 세습유효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전혀 양심적이지 않아 보인다. 마치 안에다 입는 옷을 겉에다 입은 사람처럼 말이다. 자신들이 먼저 안에다 입는 옷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고서는 그 옷을 겉에다 입는 수치심을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예장 통합은 한국교회에서 가장 건강하고 모범적인 교단이라고 스스로 자위해 왔을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도 그런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통합 교단이 산하 교회 문제하나 처리하지 못해 헌법 무용론까지 제기될 정도로 위신이 추락하게 된 점은 분명 교단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심각한 상처가 아닐 수 없다.결국 이 세기적 재판은 9월 총회에서 총대들에 의해 최종 결론이 나겠지만, 부디 “양심과 법”에 따른 공정한 판단이 부끄럽지 않은 결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칼럼 | 크리스천월드 | 2018-08-16 12:56

△김윤창 목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3:2-4) 복음을 받은 사람은장차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임하실것을 소망중에 바라고 인내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복음은 죄인으로 탄생한 자가자기를 벗고자 자기 원대로 살지 않고오직 그리스도로 살고자 하여그의 오시기까지 육신대로 살기를거부하고 고난 가운데 기다리게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복음을 받게 되면  환난이 있을 것을 말했는데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편지에 썼습니다. 그것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본받는 것이었는데그들이 유대교를 믿는 동족에게고난과 핍박을 받듯이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동족에게 핍박을 받게 된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가족이나 이웃 사람들에게서핍박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자기 원대로 살려하지 않고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대로 살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마땅히 자기 원대로최선을 다해서 살려 합니다. 또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더 얻고 취하고 이루기 위해서 쫓기듯이 살아아먄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원대로 살려하지않으니 가족과 주변사람들로부터마땅히 거부를 당하고 그들로부터욕설이나 핍박이나 원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는 자들은 그들을 자기 감정이나 생각대로 대하지 않고행해야 합니다. 그로써 자기 원대로 살지 않고그리스도로 살기 위해그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장차받을 환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이같은 환난이 없다는 것은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자기 원대로 살아가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자신들의 종교적 목적에 더 충실히행하는 이기적인 모습때문에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이 주변사람들로부터고난을 받지 않는 것은 자기 원대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있어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자기 원대로 살려하지 않는 것이보통 다른 사람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자기 열심으로 행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의해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자기 원대로의 삶을 벗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죄인이 자기 원대로 사는 것은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자기 형통을 위해 살기 때문에 고난받을 일이 없습니다. 단지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삶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외엔별 다른 것이 없으므로핍박을 받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의 복음이란죄인인 자기를 버려서 그리스도로 살고자 하는 복음의 원리가매우 분명했습니다. 특히 십자가만 알기로 했던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마땅히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삶의 양식이 다른 사람들과는 크게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처럼 욕심도 추구하지 않고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내지도 않으며,전에는 적극적이던 사람이 매우 소극적이 되고,전에 즐기던 일을 버릴뿐 아니라,다른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역행하기 때문에 너무 달라진 삶을 살게 되고따라서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복음을 듣고서 그 안에서 살게 되면너무 달라진 삶을 살게 됩니다. 더군다나 자기 열심으로 뭔가를 추구했던 사람들에게서더욱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를 믿어도여전히 자기 원대로 살고 있다면핍박이나 고난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원대로 살려 하지 않는다면사람들과 환경으로부터 거부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삶을 매우 어려워지게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도자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그래도 부족한데 그런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로 살겠다면서(실제로는 그리스도로 살겠다고 주장하거나 말하지는 않음)전혀 다른 삶의 양식을 취하면마땅히 사람들로부터 이상히 여김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세상 일이 자기 원대로 진행되지않게 하므로 삶이 점점 어려워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인한 환난입니다. 그래도 그는 믿음으로(그리스도로) 살기 위해 그런 상황들을 견디며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오실 날을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과연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옳다 여겨그 안에서 살다가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소식을 듣고서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디모데를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과연 그들이 믿음안에서 살기를 원하고 환난을 잘 견디는지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바울이 큰 위로를 받게 된 것입니다.그들이 믿음의 시험을 인내하며그리스도께서 자신들 안에 오시는 날을소망하며 굳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 이유도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위로할 뿐 아니라 여러 환난으로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래서 참다 못하여 디모데를 보내었다고 쓰여있습니다.  우리의 증거하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형제분들께 권면해 드립니다.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로 살고자 하여그의 인도하심을 구하고그 안에 살고자 하는 일은 환난이 예고되어 있는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된 복음과 믿음을 가지려 하면시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마땅히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의 양식과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험이 없다면 믿음안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와 세상을 벗는 일은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그리스도를 바라고 그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믿음을 견고히 하기바랍니다. 그것이 죽을만큼 괴로운 일임에도참고 견디셔야 합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고 앞으로 사는 일이매우 힘들어질 것 같아서마음으로부터 자기 연민이 올라와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습니다.그래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결코 세상의 환경은당신이 원하는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며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치닫으며자신의 예상과 기대를아예 저버리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로써 자기 신뢰를 버리고그리스도를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생명이 되실 때까지그를 바라게 되는 일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당신이 그의 이끄심을 받고 있다는증거입니다.  반면에 시험이 닥칠 때마다자기 원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믿음의 시련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자신이 피해가거나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그런 경우는 결코 믿음의 진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삶은 편할 수 있지만 믿음은 제자리에머물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원리대로 삶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내려 놓으십시오.그리스도를 주로 모셨으니그가 구원을 위해 그렇게 행하는 것은매우 마땅한 일입니다. 주저앉지 말고 일어서십시오.그리고 그가 행하시기까지스스로 결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자신을 그에게 드렸으니그가 행하실 것입니다.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스스로 살려는 의지를 내려놓으십시오.그러면 그가 위로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더 깊은 믿음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를 건너거듭남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당하는 환난은당신으로 자신에 대해 죽게하는그가 보내시는 복된 환경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대로 주욱 가십시오.그가 기뻐하십니다.

칼럼 | 채수빈 | 2018-07-27 12:08

△두레수도원 김진홍 목사신약성경의 요한복음 10장과 구약성경의 에스겔 34장을 목자장(牧者章)이라 한다. 좋은 목자와 나쁜 목자, 좋은 목사와 나쁜 목사의 기준을 일러 주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0장에서는 목사를 3부류로 구분하여 일러 준다.첫째는 절도와 강도 같은 목사둘째는 삯꾼 목사셋째는 선한 목사이다.먼저 요한복음 10장 1절에 절도, 강도 같은 목사가 등장한다.목사이면서 하나님의 양들인 신도들을 괴롭히고 등쳐먹는 목사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상식적으로는 설마 그런 목사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실제로 그런 목사들이 적지 아니하다. 슬픈 일이다.우리들이 어린 시절 때는 목사라면 정직함으로 인정받고 신도들을 위해서라면 밥 굶기를 서슴지 아니하고 억울하여도 새벽기도 시간에 강단 밑에 무릎 꿇은 채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는 것만으로 끝내는 목사들이었다.그러나 이제는 그런 목사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 못한 목사들이 늘어나게 되면서이다. 언제부터 목사들의 이미지가 그렇게 변하여지게 되었을까?아마 1970년대에 들어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미증유의 호황기(?)를 맞게 되면서 목사직이 고생하고 희생하는 직이 아니라 대접 받고 높임 받는 직으로 인식되어지게 되면서 목사세계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인구조사 통계표에 의하면 1970년 한국교회 신도수가 390만이었고 십년 뒤인 1980년에는 810만으로 증가되어 있다.1970년대 10년 동안에 한국교회 신도수가 2배 이상으로 증가케 된 것이다. 그러면서 먼저 목사를 양성하는 기관인 신학교가 먼저 그릇되기 시작하였다. 신학생이 되고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신학교로 모여들게 되었다. 목사직이 대접 받고 잘 나가는 직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이다.그리고 신학교들이 난립(亂立) 되어지게 되었다. 신학교에 입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기본 학력이나 시설이나 학교운영의 기준을 갖추지 못한 신학교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가 지나 80년대가 시작된 즈음에는 신학교가 무려 313 학교나 난립케 되었다.이런 현상이 한국교회가 맞은 재난(災難)의 시작이었다.

칼럼 | 채수빈 | 2018-06-11 17:46

△김윤창 목사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애굽의 종된 삶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셨다.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살만하고 복된 땅이었다.거기서 자유와 복된 삶을 누리게 할 계획이셨다.물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의 예표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된 삶에서 이끌려자유와 풍성한 삶이 약속된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에서우리가 어떤 믿음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약속한 것은 진실된 것이었다.그러나 그의 약속을 믿고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은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이르지 못하고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왜 그랬을까?하나님의 약속이 변개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것은 단순히 동의 차원을 넘는자기 존재를 부인해야 하고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그의 약속을 신뢰해야 하는 믿음의 문제였다.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마실 물이 없을 때에그들은 죽게 될 것을 감지했다.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의심됐고죽음이 현실화 되자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다.하나님의 뜻은 죽게될 상황에 처해도그의 약속을 끝까지 믿는 자들을구원하신다. 곧 자기 목숨보다, 그리고 현실적인문제가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랐어도그의 약속을 더 신뢰해야 했던 것이다.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그리스도를 따르며 믿어야 할 문제이다.죽게 될 상황에 처하자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다.그들은 하나님이 약속을 저버렸다고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들은 죽게 되었다.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약속을 신뢰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다면그와 상관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삶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그와 하나가 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에게가장 필요한 것은죽음이 예견되는 상황을 만나도그의 사랑과 약속을 신뢰하고묵묵히 따르는 일이다. 그러면 그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것과 먹을 것에 대한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불평하고 원망했다.그리고 가나안 땅의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서 또 그러했다.그들은 시험을 만날 때마다 자신들의 목숨의 위태로움을감지했고 하나님을 원망했다.가난안 땅에 이르게 하시겠다는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갔다.자기 목숨을 다해서라도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함이 마땅하나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죽어갔다.하나님이 인생을 허락하신 목적은그들의 하나님이 되고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하나가 되는 것이다.물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일 경우이다.사람이 자기 죽음이 다가와도그에 대해 눈감고자기 생각이나 판단을 버리고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를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죽게 될 상황이 찾아와도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드는 것이그에 대한 도리이자 믿음이다.그러나 대개는 죽지 않을 상황에서는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다가도막상 죽을 상황이 찾아오든지하는 일마다 실패하거나모든 것을 끝나버릴 것같은 상황이찾아오면 그 땐 그의 약속이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험이란,죽을 상황을 경험케 하시는 것이다.만일 그런 시험이 찾아오지 않는다면그래서 좋다고 여길지는 모르나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지애굽이나 그 외 나라의 백성까지시험하시지 않으셨다.하나님은 부르신 자만 시험하신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죽음의 상황에서도 그의 약속을 신뢰하고 자기 생각이나 뜻을 버리고그를 따르는 사람만이자기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죽음을 무릅쓰는 시험은필수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거의 모두가시험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며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다르지 않을 것이다.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무슨 소리냐고반문할지 모른다.믿으면 죽을 상황에서도그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구원을 약속하신 그를 신뢰하며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시험이 있어야만 믿음의 진실성이 가려지게 될 것이다.모세의 인도를 받았던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애굽을 나선 사람들이었다.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보지 못하고광야에서 죽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해도그의 나라에 들어가려면죽음을 무릅쓴 시험에도 변개치 않는신실함이 요구되는 것이다.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믿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장정만 육십 만이 넘었어도단 두 명만이 가나안 땅을 밟았다.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문제이다.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믿는다면당신은 죽을 상황에도 자신의 생각이나판단을 버리고 오직 그를 신뢰하고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평상시에는 잘 믿고그같은 시험이 찾아오면 여지없이 넘어지는 것이 문제이다.그리스도를 따랐던 제자들도 그러했다.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실 하나님 나라를 누릴 생각에 꿈이 부풀어 있었다.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기 위해 군병들에게 잡히고자신들도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직감했을 때에 그를 부인하고 떠났다.가장 확고했던 베드로도 그러했다.세 번이나 부인했으니 실수라는 말로 변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어떤 형태로든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자기를 신뢰치 않고 버려야 하는시험을 거쳐야 한다.그러나 본래 자기를 사랑하도록 되어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하나님을,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신뢰하고따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나는 당신이 누구이든믿음을 지킬 수 없음을 안다.시험을 당하면 모두가 다 넘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러했다면당신도 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험에 넘어졌을 때,그 다음이 중요하다.그의 긍휼을 붙드는 사람은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긍휼을 구하는 사람은그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믿음을갖게 되어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자기 죽음이라는진리가 깨달아지고 자기 생명으로 살고자 하지 않는 믿음의 실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곧 구원이란 자기 믿음에 대해서 넘어지고그의 긍휼을 구할 때그가 주시는 믿음으로자기 존재로부터 해방과 함께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그 나라가 자신안에 찾아오는 것이다.곧 해방과 자유와 안식, 하나님 안에서의 풍성한 삶이다.물론 영적인 삶의 풍성함이다.가난하나 부요하고,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참된 믿음과 삶을 알고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기 위한삶을 사는 것이다.그리스도를 믿되 그 믿음을 지킬 수 없는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아야 한다.그런 후에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은혜로 주시는 믿음을 받아진리가 믿어지고 자기 생명으로 살지 않는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또한 다 이루었다고 생각지 않고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도록푯대를 향해 살게 될 것이다.이것이 곧 구원받은 믿음이다.자기 신뢰를 내려놓게 하는여러가지 시험은 필수이다. 그를 통해 자기 믿음이 버려지고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긍휼을 통해 얻지 않은 믿음은자기 사랑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그런 믿음은 아무리 대단하고숭고한 삶을 산다 해도 가식에 불과하다.물론 가식을 행하는 그 자신은 모른다.그의 말씀을 듣고참 믿음을 구하라.긍휼을 통한 믿음을 갖추라.

칼럼 | 채수빈 | 2018-05-31 14:13

△두레수도원 김진홍 목사통일한국시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온몸으로 느낀다.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37장에는 통일 이스라엘에 대한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로 되는 비전을 보여 주셨다. 분단의 상처와 아픔이 최고조에 달하여 온 겨레가 신음하고 있던 시절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예언자에게 통일의 미래를 보여 주셨다.솔로몬 왕 통치 40년간 적폐가 많이 쌓였다.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지치고 반감이 쌓였다. 솔로몬 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이 아버지 때의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 채로 더 많은 적폐를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민족이 분단케 되었다.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 두 나라로 분단되어 동족끼리 죽이고 죽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로가 비극의 역사에 피해가 극심하였다. 지금 우리 겨레를 생각하면 그 시절의 이스라엘과 흡사한 처지이다.세월은 흘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포로수용소에서 통한(痛恨)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30대의 청년 에스겔에게 통일에 대한 비전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다. 에스겔서 37장에서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두 막대기를 취하되 하나는 북이스라엘 막대기이고 다른 하나는 남유다 막대기이다, 그들 두 막대기가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 손에서 하나로 통일되리라 이르셨다."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에스겔 37장 17절)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네 손에서>란 말에 주목한다. 분단된 겨레가 다른 사람들 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의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것이다. 통일이 중요하지만 누구의 손에서 통일 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그릇된 사람, 그릇된 이념, 그릇된 체제로 통일이 된다면 때로는 통일이 되지 않음만 못하게 될 경우도 있을 것이다.이제 한반도의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의 손에서 통일이 되느냐의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온다. 어버이 수령이니, 주체사상이니, 영용하신 장군님이니 하는 사람들 손으로 통일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건 절대 안 된다. 또 여하한 경우에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통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밤나무를 심는 김진홍 목사누구의 손으로 어떤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인가?어제 글에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님께서 30세의 청년 에스겔에게 이르시기를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뽑으신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 그 때가 어떤 때였던가? 이스라엘 민족이 좌절에 빠져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동서남북이 모두 막히어 민족이 나갈 길이 막혀 있던 때였다.그런 때에 하늘이 열렸다. 열린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첫 부분에서 다음같이 이르셨다."서른째 해 ...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 여호와의 말씀이 ...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에스겔서 1장 1~3절)하늘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길이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권위도 하늘을 막을 수는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통일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조건으로 통일의 길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늘이 열리면 길은 열린다. 하늘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이르셨다.<내가 너의 손으로 하나가 되게 하리라. 통일이 되게 하리라> (에스겔 37장 17절)그렇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렇게 올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날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며 준비하여야 한다. 기다리고 준비하며 헌신하여야 한다. 청년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듯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늘이 열리어 휴전선이 사라지고 통일의 길이 열리도록 기도하고 헌신하여야 한다.통일의 길이 열리려면 다음의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들 조건이 갖추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하여야 한다.하늘이 열리어 이들 기도 제목이 응답되어져야 한다.

칼럼 | 크리스천월드 | 2018-05-15 20:16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이효상 목사최근 출간된 찰스 쿱찬의 『노원스 월드(No One’s World)』를 보면 ‘구심점이 사라진 세계’를 말하고 있다. 미국교회도 빌리그레함 목사 이후 분열했듯, 한국교회도 한경직, 조용기 목사 이후 중심이 될 좋은 지도자가 없이 연합과 공익적 가치보다는 개인이나 기관의 사적 이익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또한 연합사업을 진행하는 기관도 구심점이 없는 상황이다. 정치적 이합집산은 거듭하지만 별로 영향력은 없어 보인다. ‘연합’정신이 사라진 연합기관이라면 그것이 왜 필요한가 반문하게 된다.한국교회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창조적 지도자’나 ‘기관’의 출현도 절실하다. ‘창조적 지도자’는 큰 교회 목사가 아니라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지도자이다. 전략과 전술을 알고 시세를 읽는 자일 것이다. 이런 지도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나올 수 있는 토양, 즉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이 출현하고 커갈 수 있는 공론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70년대의 카리스마’가 통하는 시대가 지났다. 새로운 지도자는 어느 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토론과 헌신 등을 통하여 다듬어 지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국교회라는 정체성을 몸으로 체감하므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지금의 교계 흐름이 상당히 우려스러운 것은 치열한 논의구조를 외면하는 것이다. 현재의 모든 의사결정 구조, 교회가 접하는 이슈에 대한 논의구조가 전근대 방식이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 운영이다. 그리고 행사를 단회적 이벤트로 치룬다. 시대 흐름에 대한 통전적 역사 이해가 없는 공시적 행사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인지 점점 동력이 떨어지고 ‘연합’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몇몇 사람들의 사진찍는 행사에 “돈내고 들러리 서라”는 식이라서 “‘연합’이라는 자리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중견목회자들은 말한다.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고질병중 하나는 한국교회에 다양한 그룹, 엄청난 인적 자산이 있으면서도 ‘공공성을 전제로 한 연합’의 부재이다. 그로 인하여 많은 낭비를 하고 있다.그럼에도 일부 기관이나 일부 인사들은 자신만이 모든 것을 해야 하고, 자신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 그 정도가 지나치면 다른 기관들은 자신의 통제하에 있기를 바라면서 될 일을 안되게 만드는 독특한 은사가 있다. 이건 엄청난 낭비이자, 사적인 욕심일 뿐이다. 나는 못하지만 다른 기관이나 다른 사람들이 하려할 때 격려하고 지원하며 축복할 수 는 없는 것일까? 이런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국교회는 발전이 있지 않겠는가?한국교회에는 많은 연합기관들이 있다. 그 기관들이 아젠다에 대해 정책적 연대 혹은 협의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능이 마비된 것으로 보인다. 기관은 많은데 어느 기관도 그런 기능, 제 구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런 싱크탱크를 지원이나 연대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기관이든 어디는 사람을 키우지 않았으니 정작 브레인이나 논객도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방향감각 제로, 존재감 제로의 상황이다.한국교회, 사회발전에 기여하려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런 큰 그림중 하나가 싱크탱크를 만드는 일이다. 지금처럼 예측불능, 통제불능의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략과 전술을 갖추고 그 역할에 맞는 인재들을 적재 적소에 배치하여 사역들을 철저히 분산해야 한다.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듯 운행되는 그런 구조가 건강한 사역구조이다.그래서 한국 사회발전을 위한 ‘한국교회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싱크탱크란 특정 사항에 대한 조사·분석 및 연구 등을 통해 각종 정책 개발뿐 아니라 정책 실행 피드백, 지속적인 개선 유도까지 수행할 수 있는 고급 두뇌집단을 일컫는다. 교단과 교파, 목회자와 평신도적 입장을 초월해 모인 브레인과 논객, NGO그룹들이 신앙, 그리고 실천력을 성경적으로 걸러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대안을 모색하고 제시해야 한다.이렇게 ‘공교회의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기관과 사람들이 네트워크화 할 수만 있다면, 싱크탱크가 출현한다면 상상외로 큰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공공적 목표와 가치를 펼쳐서 함께 공유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가려고 하는 새로운 발상의 시도가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정치 지향과 편향성, 개인의 이익만 제외한 비정치적이고 균형감각을 지닌 다양한 인물, 각자가 가진 재능과 은사, 헌신을 전제로 ‘다양성 속에 연합’을 도모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그룹이 포진한다면 이처럼 환상적 팀일 수 있겠는가?구성원이 꼭 목사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 사회를 70년대 신학교에서 배운 단순한 목회자적 사고와 수준으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평신도들로 10년이상 한분야에 헌신해왔던 각계 각층 전문 사역자들이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자리가 아니라 사역이 더 중요하고, ‘다양한 사고와 다양한 접근 방식을 인정하고 상대방과 함께 가야 산다’는 일명 ‘상생 소통법’을 가진 이들이 모이지 않으면 이대로 미래를 열 길은 없다.지금 교회는 과연 기독교 가치관을 수호하며 미래를 열어갈 전략실 싱크탱크를 보유하고 있는가?지금이 한국교회 싱크탱크가 출현해야 할 타이밍이다. 미래사회에 한국교회의 새로운 역할을 기대될 수 있다. 무엇보다 여러 사안들이 쌓여 있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두뇌집단을 모아 정책적 접근이 가능한 싱크탱크를 만들고 인재를 키워낼 적기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며 새로운 시대적, 사회적 과제에 눈을 돌려야 할 때를 보내고 있다.

칼럼 | 크리스천월드 | 2018-05-01 19:27

△두레수도원 김진홍 목사오늘은 2018년 부활절로 보냈다. 부활절은 성탄절과 더불어 기독교의 2대 절기에 속한다. 기독교 신앙에는 4대 기둥이 있다. 마치 땅에 동서남북 4방향이 있고 성경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대 복음이 있듯이 기독교 신앙에 4대 기준이 있다.1) 첫째는 창조신앙이다.창세기 시작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여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더라> 하였고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였다. 창조신앙은 우리들 신앙의 출발점이다.2) 둘째는 임마누엘 신앙이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임마누엘 하나님>이라 부른다. 임마누엘의 뜻인즉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유언에 해당하는 격인 마태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였다. 바로 임마누엘 신앙이다.3) 셋째는 십자가 신앙이다.십자가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지으신 세상으로 오셔서 대접 받으신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시고, 왕따 당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 왜 피 흘려 죽으셨는가? 인간의 죄와 죽음, 고통과 질병을 극복함에는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류구원의 길을 여셨다.4) 넷째는 부활신앙이다.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사상도 많지만 십자가 신앙과 부활신앙을 선포하는 신앙은 성경에만 있다. 기독교만이 십자가 신앙과 부활신앙을 계시한다. 초대교회 설교자들의 설교 내용은 간단 명확하였다. 한마디로 <예수 부활하셨다>는 내용이다. 부활절이 있기에 기독교가 진리의 종교요 생명과 희망의 신앙이다.

칼럼 | 채수빈 | 2018-04-03 14:47

△김윤창 목사말을 실수 했을 때 침묵하십시오.처신을 잘못 했을 때나너무 활동이 왕성할 때,너무 앞서 행동할 때,말이 많아졌을 때,아무 생각없이 다른 사람들과많은 말을 주고 받을 때침묵하십시오. 그럴 때는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을잊었을 때입니다. 자기가 너무 싫거나 미워질 때도,뭇마땅할 때나 불리한 일을 당했을 때도 침묵하십시오.곧 육신이 요란할 때입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달플 때,한숨과 한탄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새어나올 때침묵하십시오. 너무 고통스러워서 누군가로부터위로받고 싶을 때,그리고 그것을 주변에 말하고 싶을 때침묵하십시오.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여 견디기 힘들 때침묵하십시오. 누군가 미워서 살인의 충동을 느낄 때,다른 사람 혹은 자신에 대한 생각이깊어지고 많은 생각에 잠겨질 때에돌아서서 침묵하십시오. 침묵이란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그런데 말하지 않아도당신의 영혼은 매우 왕성할 것입니다.그래서 생각까지 침묵시키는 것입니다. 미래가 암울하고 어두울 때에장래에 대한 생각을 침묵시키십시오.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불안감이 일어날 때에자신의 영혼을 침묵시키십시오. 그러나 침묵하려하면 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그 것은 이미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입니다.그에 근거해서 행하는 것이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몸은 살았으나 영혼이 심판을 받았으니활동이 왕성하거든 멈추십시오.그리고 매우 단순해진 영혼으로당신의 주를 바라보십시오.당신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은영혼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온갖 죄와 미움과 분노와 아픔과 고통으로신음하는 영혼을 잠재우는 일은그냥 쉽게 되지 않습니다.완전한 침묵은 생각과 영혼의 요구를잠재우고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과 자신에 시달리고 고통당하는자기로부터의 해방을 위해그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위해 그가 세상에 오셨고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니 침묵하고 그를 바랄 때그가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온 시선을세상과 당신 자신으로부터 돌려 놓기 위해당신의 어려움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더 고통스러워 하십니다.당신이 매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그가 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그것을 하나씩 잃어갈 때의 아픔을 그가 먼저 아십니다.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하나씩 포기해 갈 때,그것이 얼마나 당신을 사무치게 할 것인지그가 먼저 아시기 때문에당신을 사랑하시는 그가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너무 잘 나갈 때도 침묵하십시오.다 잘 되어 형통하고 마음 먹은 것 이상으로 잘 될 때는자기 존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차원에서 볼 때는가장 위험한 때입니다.마땅히 침묵해야 할 때입니다. 잘 될 때일수록 엎으려야 하고낮아져야 하며,더욱 그를 붙들어야 합니다.당신의 영혼이 하늘을 날고 있을 때입니다.침묵이 안되면 시키십시오. 당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보다더욱 위험할 때는당신이 고공행진 할 때입니다. 그럴 땐 반드시 떨어질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 충격을 미리 대비하십시오. 가장 위험할 때가자만에 이어 교만해질 때입니다. 믿음 여하를 떠나서하나님은 언제까지나그런 상황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일이 안되어 좌절할 때가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것은인생의 모든 일이 자신이 아닌그에게 달렸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십자가 진리로 당신의 시선을돌려 놓고자 하시려는 것이니진리를 듣거든 마음을 강팍케 말고열린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높아진 인생을 살 때,낮아져 눈물이 흘러 날 때진리를 보십시오.십자가에 이미 죽어 있는자신을 보고 침묵하십시오.좋은 일과 나쁜 일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그런 일을 통해당신을 구원하시려는 그를 바라보십시오. 흘러가는 것들을 붙들고씨름하지 마십시오.세상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더 가져도, 좀 부족해도 그것들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그들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며그것도 당신의 구원을 위해그가 허락하신 일입니다. 침묵하십시오.그의 뜻을 알고 말과 생각과,살고 싶어하고 잘 되고 싶어하는당신의 영혼을 침묵시키고그를 바라보십시오.당신 자신을 해방시켜 주시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럴 때 자기 사랑이 죽어가고당신은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것입니다. 곧 구원에 가까워가는 것입니다.침묵은 너무 유용합니다.침묵하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바빠서는 안됩니다.

칼럼 | 채수빈 | 2018-02-19 14:34

△두레수도원 김진홍 목사대장금이라는 드라마는 한국인이라면 거의 보았을 것이다. 드라마 중에, 조선 조정에서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정하면서 중국의 허락을 받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조선이란 나라가 완전 독립국이 되지 못하고 절반은 중국의 속국처럼 지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아직도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다녀왔다. 다녀온 후 청와대 발표로는 120% 성과를 올렸다고 하나 사실인즉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선 문 대통령을 공항에 영접하러 나온 관리가 장관도 아니고 차관도 아닌 차관보 수준의 사람이었다. 얼마 전 필리핀의 두아르테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는 외무부장관이 공항에 나와 영접하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 대통령을 영접하는 격이 너무 소홀하여 속이 상한다. 거기에다 초청자인 시진핑 국가주석은 아예 지방 순시를 가버렸다. 그리고 리커창 총리와의 식사 약속도 중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연기한다는 통보를 하였다.거기에다 문 대통령을 수행한 매일경제신문 기자가 중국 경호원에게 맞아 광대뼈가 부러지고 기절까지 하였다. 그리고 국빈으로 초청받아 간다고 보도가 되었는데, 시진핑과의 회담에 대한 성명서도 없이 그냥 합의문에 합의내용 4가지만 알려졌다. 한국을 사랑하고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은 국민으로서는 몹시 당혹스럽고 화가 나는 일이다. 개인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는 국격이 있다. 정치가들이 처신을 좀 더 신중히 하여 국격을 지키고 국민들의 자존심에 상처가 가지 않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칼럼 | 채수빈 | 2017-12-29 10:59

△김윤창 목사 좋은 교회 담임인조에선교회 대표장신대 신대원네이버 블로그 : 십자가 복음다음 카페 : 생명의 십자가 복음자기를 버려 두고 그를 바라보라.그가 당신에게 무얼 행하든 그것은 은혜이다.자신이 얼마큼 왔느냐에 관심말라.얼마큼 됐느냐에도 그리하라.왜 나는 이렇지?라고 되뇌이지 말라.그것은 거의 쓸모없는 질문이다.버려진 죄인, 이미 심판받은 죄인이 당신이다.그러니 자신에게 함몰되어 어떻게 사느냐에 골몰하지 말라.오직 그의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려라.세상을 어떻게 사느냐?와 무엇이 되느냐?에 관심하지 말라.당신은 이미 심판받아 죽은 죄인임을 기억하고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라.자신을 향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라.오직 그가 당신에게 행하신 일로 알게된 자신만이 영원하다.경건이란, 자기를 살피지 않고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세상 사람들과의 삶 속에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행하는 것이다.그러면 사람이나 세상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그것이 예배요, 경건이요, 믿음이다.욕하고 비난하는 자들을 지나쳐라.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자들에게도 빠지지 말라.사람들은 좋을 때가 있고, 떠날 때가 있다.그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당신은 자기를 버려두기를 기뻐하라.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대하는지 관심 말라.자신의 지금 상태가 어떠한지 살필 시간이 있다면 그를 바라보라.십자가 진리, 그것은 당신의 삶이 이미 끝나있다는 의미이다.만일, 그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바란다면 영원한 삶을 얻게 될 것이다.사람들은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노력해도 당신은 따르지 말라. 함정이다.그들은 자신의 좋은 평판에 힘쓰거나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그 또한 함정이니 그들을 따르지 말라.당신은 이미 심판받은 존재임이 진리이다.진리를 따르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자신에게서 해방되어 그를 알게 될 것이다.진리를 아는 길은 오직 하나다.십자가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그러면 그를 알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자신에게 빠져 살지 말라.진리없는 삶이다.진리없는 자는 없어질 세상과 함께 사라지고 진리를 알면 자유와 영원을 얻게 될 것이다.

칼럼 | 채수빈 | 2017-11-17 16:11